한 정 규 /  금정면 용흥리 출생 전 환경부 공무원   퇴직(부이사관) 전 한맥문학가협회 회장 문학평론가
한 정 규 /  금정면 용흥리 출생 전 환경부 공무원   퇴직(부이사관) 전 한맥문학가협회 회장 문학평론가

내 부모는 늘 자기 능력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단돈 10원 남에게 빌리거나 물건을 외상으로 구매하지도 않고 사셨으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하지만 난 재화가 아닌 다른 한편으로는 남달리 많은 빚을 진 빚쟁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버지는 평생 금정 시골에서 사셨다. 그래서 자식들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이라고는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난 4개 부처 산하기관을 돌아다니며 공직생활을 했다. 그래서 난 돈보다 더 소중한 정신적 빚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첫 공무원을 전라남도에서 강진군으로 발령 강진군에서 공무원을 시작, 수원시 소재 법무부 산하기관, 경기도교육청, 전라남도교육청, 그리고 환경부에서 공직을 끝냈다. 그 과정에 경기도교육청에서부터 정신적인 빚을 지게 됐다. 수원에서 직장을 경기도교육청으로 옮기는 과정에 당시 경기도교육청에서는 배경이 없는 사람은 100% 북한과 접경지 한수 이북지역으로 발령이 났다. 경기도 한수 이북지역으로 발령이 나면 거의 그만뒀다. 그래서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수소문하여 일면식도 없는 보성군 조성면 출신 수원지방검찰청 임미준 검사 사무실로 찾아 가 “전라남도 영암이 고향입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 왔습니다.”고 말씀드렸더니 임 검사께서 그 자리에서 경기도 교육감에게 전화로 부탁해 평택군 교육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또 평택군 교육청에서 전라남도 영암군 교육청으로 옮길 때도 도간 인사이동은 대단한 배경 없이는 불가능하다기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던 중 광주 무진중학교를 다닐 때 한형석 교장 선생이 전남도 교육감으로 계신다기에 무조건 교육감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그분은 나를 알지 못했다.

“무진중학교 졸업생이며 교육감님께서 당시 교장으로 계셨습니다. 제자를 도와주세요”라고 편지를 썼다. 그 편지 한 통으로 전라남도 영암군 교육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또 전남도교육청 본청으로 옮길 때는 박윤종 전 광주시장이 말하면 100%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시 일면식도 없는 국회의원과 광주시장을 지내셨던 박윤종 대한적십자사 전남지사장 집으로 찾아뵙고 도움을 청했다. 박윤종 지사장께서는 자기가 도울만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며 거절했다. 그것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새벽 집으로 찾아뵙고 도움을 청했다. 결국 일주일 째 되던 날 달갑지 않게 생각을 하시며 자기 명함에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한 번 들어 봐나 주세요.” 그렇게 쓰고 명함에 도장을 찍어 줬다. 그 명함을 가지고 도교육청 인사계장 집으로 찾아가 전하며 도와달라고 부탁해 발령을 받았다. 

또 도교육청에서 환경부로 옮길 땐 역시 알지 못한 김윤덕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았다. 공직에서 퇴직 후 일자리를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고재영 당시 영산강환경청장이 여수국가산단 환경협의회 상임 대표이사로 여수에서 3년간 직장 생활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칼럼 등 글을 쓰게 된 것 또한 생명 부지 한국문단의 한 원로문인이 추천했다. 또 대한민국 최고기록 인증원의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것 또한 이퇴계 선생 후손인 지인 이필상 경영학 박사가 추천해 한국최초이자 최고 기록자로 선정됐다.

이처럼 내 삶을 위해 많은 분들에게 적잖은 정신적인 빚을 졌다. 그 빚을 갚는 수단으로 모범 공직자가 돼야겠다. 나를 도와준 분들이 나로 인해 욕먹지 않게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그것을 늘 생각하며 부끄럽지 않게 공직생활을 했다. 돌이켜보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내가 한 행동이 무모하기는 했지만 도움을 받을만한 인맥이 없는 나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진 빚을 갚지 못하고 영원한 빚쟁이로 있으니 부끄럽다.

남에게 도움을 받고 살았다는 것은 자랑이 아닌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이야기를 하게 된 데는 큰 의미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언제 무슨 일로 남의 도움이 필요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평소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남을 도울 능력이 있을 땐 적극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도와가며 오순도순 살자는 의미에서 지난날 내가 살아온 경험담을 때로는 그렇게 사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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