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기 중  전 전교조 영암지회장 전 전교조 전남지부장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현 영암전자과학고 교사
김 기 중  전 전교조 영암지회장 전 전교조 전남지부장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현 영암전자과학고 교사

도시 생활을 접고 월출산 자락에 터 잡은 지 7년째, 아직도 ‘일반 놀이반’으로 마당을 가꾼다. 며칠 전부터는 앞마당 평탄 작업을 시작했다. 굴삭기를 동원하라는 시선들을 무릅쓰고 기꺼이 삽질을 택했다. 군대 시절 숱한 삽질의 추억들을 반추하며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갈 즈음, 무언가가 시야에 잡힌다. 6년 전 앞마당 흙 매립 당시, 작업자들과 함께 커피를 마셨는데, 그때 묻힌 일회용 커피 포장 조각들이 삽질에 힘입어 고개를 들고 씨익 웃고 있었다. 아, 묻는 것만이 절대 능사가 아니라는 준엄한 대지의 경고에 숙연해진다. 안 그래도 작은 일회용 봉지에 불과한 데다, 그것마저 떼어내고 남은 끄트머리 아닌가? 작다 못해 하찮게만 여겨졌던 그 비닐 조각 하나가 나의 기억을 6년 전으로 소환하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2016년 1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아침은 매우 추웠고, 우리는 언 몸을 녹이느라 마당 가운데 잠시 화톳불을 놓고 커피 타임을 가졌다. 이내 자리를 파할 때는 나름대로 착실하게 쓰레기를 치웠는데, 아쉽게도 이 조각들이 배제되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대지는 썩지 않는 이 녀석들을 힘겹게 보듬으며 다시 찾아 줄 인간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려왔을 것이다. 

모든 것은 썩어야 순환할 수 있다. 또한 썩지 않으면 부활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순환은 부활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순환의 법칙대로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이 찾아왔다. 해마다 4월이 되면 인구에 회자되는 한 시인(T.S Eliot)이 생각난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을 키워내고),  mixing memory and desire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봄비로 여윈 뿌리를 깨운다). Winter kept us warm(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망각의 흰눈으로 대지를 덮어주었고),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메마른 뿌리로 작은 생명을 키워냈었다).

순환과 부활의 기대가 사라진 채 비인간화로 치닫던 20세기 기계 문명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황폐해진 인간 내면의 모습을 ‘황무지(The Waste Land)’에 빗대어 아프게 노래했던 이 시가 유독 와 닿는 까닭은 무엇인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요즘 대한민국 산야, 아니 우리 고장 영암의 모습이다. 순환과 부활의 원천이자 삶의 터전인 영암의 대지가 ‘그린 뉴딜’로 포장한 ‘에코 자본주의’의 공격 앞에 위태롭게 서 있기 때문이다. 2050년 탄소 중립 선언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 최소한, 1922년 시인이 ‘황무지’에서 잔인한 4월을 경고했음에도 반성할 줄 모르고 탐욕스럽게 확대 재생산을 꾀하며 자연과 대지에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해온 결과, 이제는 모두가 공멸의 위기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2050 탄소 제로화’의 전제는 당연히 자본과 투기의 논리가 아닌, 순환과 부활의 회복이자 만물이 공존하는 생태와 존재의 철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게 절박한 데도 ‘신재생 에너지 산업’으로 무장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신자유주의 투기 자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의 논밭을 잠식하려고 하고 있다. 더욱이 법망을 통하여 이를 감시하고 막아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일부 국회의원과 정치인들마저 ‘경자유전’의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농지법 개정을 추진하며, 빌딩이나 공장 건물 지붕이 아닌,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들판을 태양광 패널로 덮자고 하니 이 어찌 잔인한 4월이 아니겠는가?

4월 4일(일)은 부활절(부활 대축일)이다. 설령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올해 부활절을맞는 의미는 새롭다. 비록 잔인한 4월이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사랑의 연대성과, 사랑은 부활의 씨앗임을 일깨워준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이다. 지난 3월 26일부터 개봉된 영화 ‘부활’을 통하여 신부님은 새롭게 부활하여 우리 곁에 계신다. 이 영화를 통하여 10년 세월을 뛰어넘어 신부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게 밀려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신부님은 ‘이 시대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사셨다. 신부님은 내전과 가난과 질병으로 마치 황무지 같았던 남수단 ‘톤즈’에 병원이자 학교, 학교이자 교회를 세우고 현지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믿음과 희망, 사랑의 씨앗을 심었다. 이제 신부님이 돌아가신 지 10년, 신부님이 뿌린 씨앗은 열매를 맺었다. 그 아이들 중 의사, 약사, 의과대학생만 57명이다. 이 제자들이 다시 스승의 길을 걸으며 사랑으로 부활의 씨앗을 퍼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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