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로 무장한 국사봉 의병부대…일본군 기병 중대 배치해 
영암 의병사(28)  ■ 호남 의병의 선봉, ‘영암 의병’

wleh<일본군 수비대 배치이동 상황>

 






 

지도1
지도1

천혜의 요새 국사봉

국사봉이 심남일 의병의 거점이라는 사실은 다른 진중일지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1909년 1월 2일 영암수비대의 보고에 “적 근거지 즉 분토동산을 포위할 목적으로 1908년 12월 16일 장흥수비대 15명, 영암수비대 47명 등 62명의 토벌대가 영암, 장흥, 능주, 영산포를 연결하는 선을 형성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도 국사봉의 ‘분토동’이 의병본부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9년도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그곳을 근거로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국사봉이 오랫동안 ‘호남의소’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표에서 보듯 1908년 11월 이후에도 영암지역에 부대 규모를 더욱 늘려야 한다는 내용 또한 주목된다. 1908년 5월 이전에 영암에 전남에서 유일하게 기병중대가 배치되었는데, 이제 더욱 그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심남일 의병부대가 이동하기 이전에 국사봉에 의병부대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곧 영암 의병이 주축이 된 ‘호남창의소’가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 증강된 의병부대 ‘호남의소’가 다시 결성되고 있어 부대의 증편이 필요하다는 보고서가 아닌가 짐작이 되고 있다.

결국, 국사봉이 심남일 의병, 곧 ‘호남의소’의 사령부임은 분명해졌다. 심남일이 이곳을 의병본부로 삼은 것은 ‘호남창의소’가 이미 그곳에 근거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겹산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로 일본 토벌대의 접근이 어려운 지형적 이점, 그리고 남평, 강진, 보성, 장흥, 해남 지역까지 아우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폭도사’의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의병과 일본군 전투일지’(남평·능주지역)에 따르면 남평·능주 방면에서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지역은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의 의병부대와 일본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둘러싼 현장이다. ‘심남일 실기’의 접전일기에서 1908년 6월 19일 남평 장담원에서 왜병 5명을 사살하였고, 6월 25일 능주 노구두에서 후군장 노병우를 시켜 기습 공격하여 왜병 5명을 사살하였다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909년에 들어서 박민홍·박사화·강무경 의병부대가 단독 또는 연합부대를 결성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던 곳이 남평이다. 따라서 남평 지역에서 일어난 대부분 전투는 ‘호남의소’ 의병들과 관련이 있다. 

지도2
지도2

 

국사봉에 ‘호남의소’ 사령부  

남평이나 능주는 ‘호남의소’ 사령부가 있는 국사봉과 그 줄기가 연결되고 있어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일본군이 화력은 우세하더라도 의병들은 합진을 통해 병력 숫자 면에서 일본군을 압도하였고, 해당 지역에도 밝아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군과 ‘호남의소’ 의병들이 가장 치열하게 교전을 한 곳은 아무래도 영암지역이었다. ‘의병과 일본군 전투일지’(영암)에서 입증되고 있지만, 의병들의 피해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08년 8월 28일에는 일본군과 무려 3시간이나 교전한 것을 포함하여 엄청난 전투가 영암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남일실기’에 영암 금정 사촌 전투에서 영산포 헌병대장 琴平山 이하 기병 수십 명을 사살하고, 영암 덕진 영보리 내동 뒷산에서 영암 수비대장 楠本 대위와 부하 10여명을 사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이 이루어진 곳이 수십 곳이었다. ‘실기’에서 말한 일본군 사살 숫자는 그대로 믿기에는 망설여진다. 영산포 분견대의 숫자가 수십 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수십 명에 가까운 일본군의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면, 헌병보조원까지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본군들은 국사봉으로 의병들을 밀어붙이며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1908년 12월 16일 영암·장흥 수비대로 구성된 일본군 토벌대가 국사봉(분토동)을 포위한 채 21일까지 5일간 기다리다 다시 의병의 사정을 살핀 후 계획을 수립하기로 하였다 한다. 실제 이 무렵 일본군의 군사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의병사령부를 공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가 여의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의병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일 것이다.
한편, 1908년 9월 20일 선봉장 강무경이 장흥 유치 신풍으로 의병 100명을 이끌고 나아가 왜병 20명을 사살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심남일 의병부대는 강진 병영·장흥 유치 일대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심지어 해남읍에까지 쳐들어가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전투들은 모두 덕룡산 곧 국사봉 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겠다. 국사봉이 ‘호남의소’의 사령부였음을 새삼 알 수 있겠다. ‘호남의소’ 의병들은 국사봉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2년 넘는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일본군 토벌대의 공격도 국사봉을 최종 목표로 삼았음은 물론이다. 

일본군 최종 목표는 국사봉

전남 의병들은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 현황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전남 의병과 일본군 전투 횟수 현황’과 같다. 나주지역의 남평(6회), 화순지역의 능주(10회), 영암(23회), 장흥(12회), 강진(5회)은 거의 국사봉에서 출발한 ‘호남의소’ 의병과 관계가 있다.<지도1>

특히 국사봉(▲)을 중심으로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대혈전이 전개되었다. 국사봉이 전남지역 의병전쟁의 사령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군은 여러 차례 국사봉을 포위하여 공격을 시도했다. 이때 국사봉 의병부대와 일본 토벌대 사이의 구체적인 교전 상황을 다음 사례에서 살필 수 있다. 나주 경찰서장이 보고한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소관은 일·한 순사·헌병 합동의 1隊를 인솔하여 정오 남평군 죽곡면 선동에 도착한 바, 수괴 박사화·박민홍·강무경이 인솔하는 약 250명의 폭도가 선동 배후의 덕룡산이라고 칭하는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즉시 사격을 가하였으나 적은 천험(天險)의 지리와 다수를 믿고 완강히 저항하였는데 교전한 지 3시간 후 드디어 남쪽 영암군 방면으로 궤란시켰다.(중략)

25일 적과 충돌한 남평군 죽곡면과 덕곡면의 중간에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아 있는 덕룡산에는 폭도가 아직 진지를 구축, 집단의 모양이 있음에 의하여 소관은 26일 순사 10명·한 순사 5명을 인솔하고 나주 헌병분견소 근무 상등병 3명·보조원 2명과 함께 토벌을 위하여 급히 덕룡산과 약 1㎞ 떨어진 작은 구릉에 이르렀을 때 적의 다수는 덕룡산의 준엄하고 해발 1500척의 고지임을 믿고 그 정상에 정열하여 우리 부대를 향하여 빈번히 발포하고 또 때때로 대포를 발사하여 완강히 저항하므로 즉시 산개하여(하략)

이 보고서를 통해 당시 ‘호남의소’ 본부가 국사봉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겠다. 국사봉을 일본군 토벌대가 공격하려 할 때, 국사봉의 의병들이 대포를 발사했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당시 국사봉에는 포대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의소’ 본부를 지키기 위해 의병들이 대포가 사용되었다. 고지에서 발포하는 포탄 때문에 일본군이 국사봉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겠다. 대포로 무장한 의병부대는 ‘호남의소’가 최초라 하겠다. 당시 국사봉을 점령하기 위해 일본이 수립한 작전 계획도를 보면 국사봉을 점령하기 위해 가용 가능한 모든 전력을 일본이 동원함을 알 수 있겠다.

국사봉을 포위한 일본군 토벌대 작전 계획도를 보면 일본 토벌대가 국사봉을 포위하며 압박해가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지도2>
 
국사봉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일본군과 ‘호남의소’ 의병 사이에 처절한 전투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고 남음이 있다. 국사봉이 의병본부임도 다시 말해준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