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기 중  전 전교조 영암지회장 전 전교조 전남지부장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현 영암전자과학고 교사
김 기 중  전 전교조 영암지회장 전 전교조 전남지부장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현 영암전자과학고 교사

‘읍성길’을 걷는다. 우수 지나 어느 새 경칩이다. 살갗을 스치는 봄바람이 정겹다. 낯익은 읍내 풍광들이 성곽 주변을 포근히 감싸준다. 이 포근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지척 서남리 오거리 ‘장독천’이 손짓한다. 장독기(장군기)를 땅에 꽂으니 샘물이 솟았다 하여 ‘장독천’이란다. 영암에 터 잡은 이래 무심코 지나쳤을 뿐, 이 스토리를 마음의 텃밭에 심은 지는 부끄럽게도 최근의 일이다. ‘장독천’ 스토리에는 ‘양달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40년 짧은 삶의 이정표마다 그의 길이 새겨져 있었다. 7촌 당숙 스승삼아 처음 떠나는 화순 유학길과 저 머나먼 한양 땅까지 과거보러 가던 길, 무과에 합격하고 기뻐서 무서움도 잊은 채 밤길 달려 집에 오던 길, 해남현감 재직 중에 모친상 비보받고 오열했던 도포 봉호리길, 시묘살이 중에 왜적 침탈 급보받고 영암읍성 거병하던 길, 형형색색 ‘창우대’ 변복하고 비호처럼 적진 내닫던 길, 발호하던 왜구들을 갯벌로 유인하던 길, 왜구 토벌 일등공신도 상중 죄인이라 승첩 손사래 치며 훌훌 떠나던 귀향길, 창독으로 고생하며 의연히 택한 저세상 길이었다. 그래서 읍성길은 그와 동행한 인간의 길이요, 정의의 길이요, 사랑의 길이다.

1555년 을묘왜변(명종 10년) 당시 영암군은 영산강과 서남해 바닷물이 만나는 요충지였을 것이다. 리아스식 해안에서 육지로 가는 길목이었던 셈인데, 당시 ‘달량진(해남 남창)’이 영암군에 속해있었던 것으로 보아 서남해안 바닷길이 영암읍과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지속적인 간척사업으로 육지로 변했지만, 지금도 상대포, 해창, 덕진 등 강과 바다를 상징하는 지명들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또한 고려시대부터 혼란기에 접어든 일본 ‘다이묘’ 시대에 ‘사무라이’들이 ‘왜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조선의 서남해 지방을 노략질해왔고, 이에 맞서 영암은 호남 내륙과 조선 후방을 지켜주는 서남해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다. 이제 해발 40미터 영암읍성은 ‘달량진’을 격파하고 파죽지세 바닷길을 타고 들어와 영암향교에서 횡행하며 기세등등해진 왜구들과 불안에 떨며 맞서야 했다. 전라방어사는 한양의 금군 500명을 앞세우고 왔건만 성안에 숨어 몸만 사리고 있었으니, 1555년 5월, 영암읍성의 하루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게 지나고 있었다. 

을묘왜변 영암읍성 전투의 영웅이자 조선 최초의 의병장인 양달사 장군, 그의 호가 ‘남암(南巖)’인데, 이는 ‘영암(靈巖)’의 ‘암(巖)’자와 일치한다. 영암의 남암, 실로 월출산의 큰바위 얼굴을 보는 듯하다. 그는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에 왜구들의 침범 소식을 접한다. 삼종제 송천공 양응정과 상의한 후 지체없이 거병을 결심한다. 오로지 그의 결단이 있었기에 영암읍성은 지금까지도 외침으로부터 향촌을 지켜 낸 자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27년 연하 이순신 장군의 예표라 하기에 충분하다. 임진왜란으로부터 서남해안을 지켜낸 이순신 장군, 그리고 임진왜란의 전초전인 을묘왜변으로부터 영암과 서남해안을 지켜낸 양달사 장군의 공통점은 아래 두 시에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 횡행하는 왜구들로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니, 영암성루 아래 맑은 강물은 긴 슬픔을 띄고 밤새도록 우네.” 

  “~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터에, 어디선가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제주양씨주부공파세보’와 ‘난중일기’에 실린 두 시를 보면 전투를 앞둔 두 장수의 담대하면서도 애절한 마음이 너무나 닮아 있다. 

최근 양달사 장군 현창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영암군은 지난 2019년 8월 영암읍 서남리 ‘장독천’과 도포면 봉호리 ‘양달사시묘공원’을 ‘영암군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한 데 이어, 관련 단체들을 중심으로 5월 영암읍성 대첩 기념사업과 격전지 탐방행사, 장독천 주변정비 등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더 나아가 을묘왜변 기념관 건립, 읍성 구간 복원, 4대 문루 복원, 관아와 부속건물 건립 등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낙안읍성이나 청도읍성 수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당시 규모나 지정학적 위치, 을묘왜변 영암 승리 역사의 현재적 의의를 보더라도 지대한 관심 속에서 추진돼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포스트 코로나와 학령인구 감소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역사교육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읍성을 중심으로 한 역사 탐방길 조성과 스토리 구성 작업이 시급하다. 당시의 객관적 사료에 인간적 스토리가 가미된 읍성의 총체적인 생활상이 우리 삶에서 생생히 재현될 때 우리의 노력은 진정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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