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된 최후 조건

총독부가 무송에게 내건 마지막 회유 조건인 일인(日人) 사원채용과 일제 정책협조는 끝내 무송에 의해 거절되고 말았다.

초선은행을 통해 중간 조정에 나선 회유가 실패로 돌아가자 총독부는 드디어 1942년 2월 호남은행 합병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총독부의 이재 당국에 의해 내려진 강제합병 명령은 특검 결과를 합병원인으로 내세웠다. 즉 평소 일어를 사용 하지 않은 점 ▲일본인 사원 채용을 거부한 점 ▲일본인 및 일본인 단체에게 자금을 융자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배일(排日) 기관인

호남은행을 그대로 놔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상업은행과 동일은행 중 합병은 행을 택일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려지자

무송은 총독부를 찾아갔다. 당시 이재국장은 水田으로 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도대체 합병이유가 무엇이오:"

水田을 만난 무송은 은행합병 원인을 따지기 시작했다."하아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말씀 하시오. 무송 선생."

水田은 능청을 떨었다. "난 지금 흥분한 게 아니오. 합병하게 된 원인을 말해 주시오""그것은 무송 선생이 더 잘 아실텐데""모르니까 묻는게 아니오: "특검이란 공연히 한게 아니오. 또 그 결과를 우린 묵과할 수 없오"

"그럼 우릴 배일기관으로 몰아 합병 시키려는 거요:""말이 지나치시군요. 그러나 그것은 별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무송선생-" 水田이 다시 은밀히 무송을 불렀다. "우리 일에 협조를 해주시오. 무송선 생만 협력해 주신다면

호남은행 합병건은 보류할 수도 있습니다만…" "은행일에 대해선 나 혼자만의 생각 으론 안되오. 사원 전체의 의견에 의해 서 정해지고 있소. 또 지금보다 더 협 력을 하시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현재 입장으로선 협력할 일이 더 이상 있을 것 같다."음 할 수 없는 일이로군"

기울어진 대세 水田과의 대담은 별다른 진전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와의 대면은 오히려 은 행합병을 기정사실화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김병로 선생등과 함께 은행합병을 막 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3월에 들어

서 총독부의 독촉은 더욱 심했다. 총독부의 독촉에는 또 다른 뜻이 있었다. 그것은 무송이 해남군 우수영에 있는 충무공 명량대첩비를 총독부가 뜯으려 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반대여 론을 들고 나오자 관심을 은행쪽으로 돌리기 위해서도

빠른 합병을 촉구했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태평양 전천찰치르면서 임진왜란때 자신들이 크게 패한 명량대첩비를 그대로 두면 전쟁중 군인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비를 철 거하려고 서둘고 있었다. 이 명량대첩

비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데 대한 기념으로 숙종때 세운 기념비였다.

높이 2m 67cm, 폭 lm 64cm의 이비 는 숙종때 대학자 서하 이민서가 지은 글에 이정영 글씨로 명량전투가 있은 지 91년만에

세운 이 충무공 비로선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이 비 문을 철거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선조들의 낯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서 였다.드디어 1942년 3월 전남경찰부(현 전 남지방경찰청)로 하여금 우수영의

충무 공명링대첩비를 뜯어 서울로 올리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그러자 무송은. 뜻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부당한 처사임을 강조했다. 이 얘기가 어떻게 전남 경찰부의 정보망에 걸려 들었는지 일본인 경찰부장이 하루는 찾아왔다.

"무송 선생님,저희들 일에 협조를 해 주십시오" "아니, 제가 언제 협조하지 않은 일이 라도 있단 말입니까:"

"그런게 아니고 이번 명량대첩비건 얘기인데 제 체면을 봐서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선동적인 말을 말아 주십시오"

"그것 참 이상하군요. 명량대첩비 같은 하찮은 비에 왜 그리 일본의 당신들이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군요.

비문을 뜯어 옮기는 작업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옮긴다 해도 남의 조상들이 애써 세워 놓은 비를 뜯어 간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처사가 아니오:" 무송의 이 강경한 말은 곧 총독부에 보고되고 말았다. 따라서 가뜩이나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던 총독부는 더이상 회유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은행합병을 강요했다. 다분히 보복적이었다. <계속>

[사진]이충무공의 명량대첩비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데 대한 기념으로 숙종때 해남 우수영에

세워진 비를 일제는 강제로 철거하려 했다.

문배근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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