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의 회유

무송은 어느 날 평소 친분이 있던 최인식 기자의 안내로 매일신보 사장 가네가와의 방문을 받게 됐다. 가네가와의 원래 이름은 이성근(季聖根) 으로 황해도 출신이었다. 그는 기미 독립 당시 평안북도 경찰서 고등과장을 지낸 후 공을 세워 전남도 산업과 장과 충남지사까지 지낸 전형적인 친 일 인사로 매일신보 사장이 된 인물 이었다.

무송을 찾아왔을 무렵 친일 거물이 된 가네가와는 오래전 무송과도 서로 안면이 있던 터였다. 이날 가네가와의 방문목적은 총독부의 지시로 무송을 구슬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총독 부가 이 무렵 무송을 회유하려는 것은 호남의 유력자 무송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여러 가지 일에 협력을 얻고자 함이었다. 당시 일본은 각 지방유지들의 협력이 절대 필요했다.

그 무렵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에 이어 미국, 영국에도 선전포고, 각종 물자와 군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일본 본국의 힘으로는 전쟁수행 이 어려워 부족한 물자와 군대를 조선에서 충당하려 했다.

따라서 부족한 전쟁물자의 공출과 학병 등 징용병들을 모집하려면 조선의 각 지방유지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매일신보 사장 이성근이 친분이 있는 최인식 기자를 앞세워 광주에 내려온 것은 바로 그들의 정책에 평소 비협조적인 무송을 포섭하기 위해서 였다.

무송의 주변에 인촌, 고하,김병로, 백관수 등이 있음을 안 총독부는 무송을 항상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시 호남지역에서 장학사업을 펴는 등 신망이 두터운 유력자로 급부상한 무송의 위치 뿐만 아니 라 황실불경 사건을 경험했던 터라 총독부는 평소 무송과 안면이 있고 호남에서는 유력인사인 이성근을 보내게 됐다.

은행합병 종용

무송을 만난 가네가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협력해 줄 것을 간청 했다. 이때 무송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일 거두인 이성근 앞에서 만일 일제를 욕했다간 당장 총독부에 보고돼 불온사상자로 몰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2천여명을 투옥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일제는 전쟁을 일으킨 뒤 더욱 한국내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어느 정도 무송의 협력을 얻어낸 이성근은 우쭐한 기분에 송진우, 김성수를 자주 만나는 것에 대해 불쾌 함을 드러냈다. 반일본 색채가 짙은 그들을 계속 만나게 되면 무송 자신 도 사상이 나쁜 사람으로 몰리게 된 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무송은 기분이 몹시 나빴다.

무송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성 근에게 대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꾹 참고 앉아있던 차에 절친한 친구들을 매도하자 무송은 그만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최인식의 중재로 두 사 람의 싸움은 곧바로 중지됐지만 악감정은 쉽게 사라질리 없었다. 이때 한 번 틀어진 사이는 후일 총독부에 사 상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고되어 또 다른 화를 낳게 된다.

이성근은 해방이 되면서 친일 거두 김덕기와 함께 반민특위의 처벌을 받은 몸이 되었지만 무송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보고된 것이다. '

총독부는 잠시 늦추었던 은행 관계 일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은행을 흡수한다는 정책수행과 함께 무송의 활동무대인 은행을 없애려는 계획이었다. 합병은행으로 조선 상업은행과 동일은행중 택일하라는 것이었다. 주식은 1대1로 평가할 것을 종용했다. 그들의 재산평가 비율로 하더라도 호남은행이 막대한 손해였다. 또 일인 사원을 채용할 것과 정책협력을 최후의 회유조건으로 무송에게 내걸었다.〈계속〉

[사진]태평양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일제는 부녀자들까지 동원해 불끄는 작업 까지 훈련을 시켰다. 사진은 양동이에 물을 담아 소화작업에 동원된 부녀자들.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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