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조상과 부모가 있기 에 우리가 있듯이 자신의 태(胎)가 묻히고 꿈과 이상을 키우며 성장해온 고향이 있기에 항상 그곳을 향수와 함께 동경(層傷)하며 사는가 보다. 출 향인이면 누구나 같은 생각이겠지만 그 중에도 이 사람처럼 타향살이에 주름살이 깊어진 낙조(落照)세대의 고향과 그 조상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가난과 기근(鐵鐘)의 상징이며 호구지책(細ㅁ之策)이던 보릿고개를 경험한 곳이며 모골(毛#)이 송연(使然)한 왜정치하 와 6.25 동란의 민족수난에서 질곡(淫植)의 애달픈 사연이 있는가하면 그 인고(忍苦)의 세월을 같이 살아온 조 여부모(祖與父母)가 잠드신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의 고향은 영암읍에서 독천 에 이른 왼편에 그 위용(威容)을 드러내 용출(資出)한 석산이 유서깊은 선황산(당되산)이고 그 품에 안긴 선황리의 본촌 당리마을로 비족(鄕族) 창 녕조씨(가)의 집성(集姓) 자작일촌이기도 하다.

비조(鼻祖) 22세에 정착한 누대의 조상들은 전통 유교이념과 한학탁마 獨磨)로 입지(立志)를 굳혀온 선비정신에서 문벌의 명예를 생명같이 중시 했고 그 후학의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학문으로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예와 법도는 몸소 실천으로 깨우쳤으니 그 하늘같은 유덕(遺德)은 백골난망(白骨難忘)이다. 고향하면 누구나 어린시절의 많은 일들이 생각나겠지만 이 사람 에게도 반세기란 긴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낭주중학교 학창시절의 추억이 있다.

6.25의 총성이 몇은 지 엊그제이던 1953년, 폐허(廢墟)의 땅 독천삼거리에 미제 천막을 치고 학우들과 모교 뒤 장전산을 오르내리며 호연지기를 키워가며 보도블럭 책걸상에 향학열을 불태웠는가 하면 하학후에는 모교가 세워질 학교 터고르기에 여린 손 물집이 생겨도 어엿한 교실에서 공부하겠다는 기대만으로 구슬땀을 홈치던 그 예산이 희미한 흑백영화처럼 아른거리는 추억으로 반추(反通)된다.

그러나 귀향길 왼편에 올려다 보이 는 모교는 옛시련의 반흔(反度)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장엄한 그 모습이 자랑스럽고 무상한 세월에 금석지감(今音之感)이 들기도 하고 우리에게 배움 의 눈과 귀를 트이게 하셨으나 이제는 고인이 되셨을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은사님들과 백발이 촘촘할 그리운 옛 학우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큰 병을 앓아본 사람만이 건강의 진가를 알 듯이 타향살이를 해본 사람만 이 고향과 조상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 것임에 지금까지는 그 소중함을 깨우치게 한 객고(容告)였다면 이젠 낙엽귀근(落≪歸根)의 순리앞에 멀리 떠돌던 철새가 둥지를 찾는 귀소본능(歸 集本能)으로 조상의 숨결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이날 따라 고향과 조상 그리고 죽마고우들도 그립기만 하다.

조창호 미암면 출신 재광영암군향우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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