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황국신민화

일제는 조선의 민족언론 기관을 없애 버린 뒤 곧이어 8월 17일 국민정신 총 동원연맹을 조직,전시생활 체제를 강요했다. 생활 검소화를 부르짖는 한편 아침 6시 기상, 낮 12시 묵도 등을 강요했다.

10월에 들어서는 조선정신총동원연맹을 다시 국민총력연맹으로 개편한 그들은 황국신민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국에 걸쳐 펴게 했다. 그리고 총력연맹을 통해 각 지역마다 대회를 열도록 해 징용협조,공출협조 등을 유도했다.

광주에서도 총력연맹이 열렸다. 광주에서 대회를 갖는 날 전남도는 무송에게 황국신민 서사를 읽어 줄 것을 의뢰했다. 대회에 나갈 것을 약속한 무송은 정작 총력연맹이 열리는 날 은행관계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불참하고 말았다. 일본인들의 불만은 의외로 컸다.

이때 뿐만 아니라 각종 기념식에 초대를 해도 항상 대답은 "그러겠다" 해 놓고 전무 취체역 김신석을 대신 보내 축사를 읽도록 해 그동안 쌓인 불만이 총력연맹 불참을 계기로 터지고'만 셈이다.

"무송의 사상이 의심스럽다" "전쟁에 협력을 않는 것은 나쁜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는 등 많은 억측을 내놓았다. 일본인 사회에서 비판의 소리가 높자 전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인식이 찾아와 이러한 항간의 움직임을 전해 주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때 같은 조선인들 중에서도 무송이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고 있는 일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추원 참의는 거의가 내용적으로는 총독부의 지명에 의해서 임의로 임명된 직책이었다. 이러한 얘기를 주위로부터 전해들은 무송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추원 회의에 참석해서는 일제가 동성동본 혼인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최후까지 반대, 철회시킨 한사람 이기도 했다.

총독부의 견제

총력연맹사건 등 그동안 일련의 사태로 몰린 무송은 신민(臣民)사상이 희박하다는 일본인 사회의 여론이 높자 총독부의 눈에 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그동안 묵인해 주던 은행업무까지 다시 간섭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본인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 점과 일본인 및 일인회사에 융자를 해주지 않는다는 등이었다.

이에대해 일본에 대한 적대감에서 나온 것이라 트집을 잡은 그들은 여러 가지로 무송을 협박했다. 일본의 일에 적극 협력하라는 얘기였다. 그 협력의 하나로 먼저 은행에 일본인 사원을 쓰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무송은 일절 개의치 않고 모튼 척 해버렸다. 총독부로서도 그만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갖은 협박과 회유를 벌인 것에 대해 당시 호남은행 부지배인이었던 장용태는 '조흥은행 60년지' 를 통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호은(湖銀)은 마치 민족적 의기 앙양의 표징인 둣이,왜정의 '눈의 가시'적 존재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각양 각색의 협박과…회유의 일책으로서 상무 및 본점 지배인에 일인(日人)만 채용하면 모든 문제, 즉 은행과 간부에 대해 물심양면으로 적극 후대하겠다는 유혹적 암시 역시 일축되었다.…"

결국 이러한 미움은 1941년 가을에 은행 특별검사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특별검사라는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미 3개월전에 정기은행 검사를 마친 터라 이때 가진 특별검사는 고의성이 다분했다.

1941년 10월 총독부 이재국에서 나온 호남은행에 대한 특별검사는 무려 50여 일간을 끌었다. 당시 보통 정기 은행검사의 경우 길어야 일주일 정도로 끝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은행안은 자연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재국의 특검이 있기 하루전 호은측은 이 사실을 알았다. 당시 호은 지점장으로 있던 구형서를 통해 들어온 정보는 지금까지 양상과는 다른 엄한 검사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구형서의 친형으로 당시 조선은행에 근무하던 구용서(전 산업은행 총재)로 호은 특검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다. 호은으로서는 특별히 준비할 게 없었다. 평소 일반 고객에게 공개할 만큼 장부정리가 깨끗한 터라 별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이재국의 검사는 까다로웠다.〈계속〉

[사진]애국 반상회의 모습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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