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군 신북면 월평리 평지에는 원형 야산이 있습니다. 그 야산 정상에는 사방 30m 정도의 지소가 있는데, 그 이름이 여석산 천지입니다. 수심이 어찌나 깊은지 명주실 3꾸리 정도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수량 또한 한량없이 한해가 들 때는 관개용수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여석(숫돌)이 무진량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토벌할 때의 이야기가 있은 후로 이곳의 여석이 유명하게 되어, 여석을 많이 파내니 지소가 생겼다고 합니다.

후고구려의 왕건장군이 후백제를 토벌하기 위해 나주지역으로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나주지역은 평야지역 이어서 쉽게 토벌할 수 있었습니다. 영암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산세를 파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몹시 목이 말랐습니다. 고을 어귀에 샘이 있었는 데 그곳에서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습 니다. 목이 마른 처지라 염치를 불구하고 처녀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였습니다. 처녀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라하며 물 한 바가지를 떠주었습니다. 왕건장군은 급하게 마시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물보다 버들잎이 먼저 입으로 들어 올려고 하였습니다. 급한 김에. 버들잎을 입으로 불어서 밀치며 물을 마셔댔습니다.

"휴우~, 살 것 같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조금전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하나 띄웠던데 그것은 무슨 연고인지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말을 급하게 타고 오신 것을 보고 물을 급하게 마시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물을 너무 급히 마시다가는 변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버들잎을 띄운 것이랍니다."

왕장군은 처녀의 영특한 재치에 감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장군은 이 처녀를 배필로 맞아들였습니다. 이 여인은 나주 흥룡 출신의 오자근의 딸로서 후일 신명왕후가 되었습니다.

오자근은 사회가 어지러운지라 오래 전부터 영특한 그의 딸에게 병법과 지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왕장군은 나주를 기점으로 토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점을 신북으로 옮겨 여러 지역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덕진지역과 반남지역을 정벌하는데 누차의 격전에 용천검이 둔하였습니다. 이 용천검은 후고구려의 왕께서 친히 하사하신 진귀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남지역의 토벌에 고전을 하자 용천검을 탓하며 분노하였습니다. 왕건이 크게 실망한 것을 보고 그 부인이 신명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네 발 아래를 보아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기도를 멈추고 눈을 번쩍 들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발 아래를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여느 것과는 다른 숫돌이 있었습니다. 왕장군이 잠이 든 뒤 부인은 용천검을 갈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인은 다음날 반남지역 정벌에 나선 왕장군은 대성공을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숫돌이 좋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군용으로, 또 일반인들에게도 애용되었습니다. 수년을 두고 숫돌을 무한량 파내니 그 곳에 천지가 생겼고 그 깊이 또한 무한정 길어 중국까지 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삼경에 닭이 우니, 그 소리가 여석산 천지까지 들렸고, 비가 오니 장항아리를 덮으라는 중국에서 하는 소리가 들려 숫돌 캐는 것을 중지했다고 합니다.

〈영암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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