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간척사업 착수

무송이 추진하던 서호간척사업은 당초 예상보다 지연됐다. 일제가 1937년부터 전시 체제로 몰고 갔던 탓이기도 했다. 여기에다 간척지 내에 당시 세도가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효 문중의 또다른 박씨 선산이 자리해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다. 당시 박씨 선산은 서호면 엄 길(속칭 둑제)에 있었다. 이 엄길에서도 죽도란 섬내에 있는 선산은 천하명당으로 예로부터 유명한 곳이었다. 둑제에서 보면 운중반월(雲中半月)로 보이는 죽도는 밖의 조수를 막으면 명당이 끊겨 진다는 전설 때문에 박씨 집안은 간척 사업을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 선산의 주인 박영효는 친일 정치가로 1884년 갑신정변때 사대당(事大黨)에 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 내무대신을 지냈고 한일합방후 후작벼슬까지 받았던 세도가 당당했던 인물이다. '

결국 우송의 끈질긴 설득작전으로 19399년 간척허가를 가까스로 얻어내 2월 착공식을 가졌다. 총독부에서도 전쟁이 무르익어 가자 쌀이 부족할 것을 대비해 쾌히 승낙을 해주었던 것이다.

서호간척사업 허가를 받은 무송은 먼저 아천만 일대 측량조사에 나섰다. 총독부 일본인 측량기사 아야다, 가게, 강가와, 오노 등을 초청해 제방공사에 따른 적지 선정조사에 착수했다.

국토를 확장한다는 그의 뜻은 한 발 짝 눈앞에 다가선 둣이 보였다. 만약 공사가 완공되면 농토확장외에도 수백 세대의 농민들이 한꺼번에 땅을 벌어 먹을 수 있어 농토 없는 농민들의 서호간척공사에 대한 기대는 컸다.

당시 농토없는 농민들의 경우 시집갈 처녀가 쌀 2말만 먹고 가도 잘 간다고 할 정도로 가난했다.

전쟁물자 착취

측량업무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무렵인 4월초 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회사이익 배당 및 자금융통령을 공포했다. 조선의 민족기업들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이었다.

지난해 5월 10일 조선, 대만,화태 등지에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은 이미 전쟁의 장기화를 의미했다. 전쟁물동량이 달린 일본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방면에서 착취해갔다. 조선에 막대한 짐을 지운 것이다.

군(軍)장정. 지원병 모집을 비롯 쌀 등 조선의 물자를 중국 전선으로 전쟁이 나면서 마구 빼돌렸다.

1938년 2월 26일 공포된 조선육군지원병령이란 미명아래 끌려가기 시작한 조선 장정들은 이듬해인 1939년 6월에 첫 전사자를 냈다.

마침 자금융통령이 내릴 즈음 서울에 올라가 있던 무송은 백관수와 고하 등을 만나 시국을 논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입버릇처럼 일본의 여러 소행으로 보아 망하리라는 것을 예언처럼 말하던 무송도 중 · 일전쟁이 오래 끌면서 모든 물자를 수탈해 가자 걱정이 됐다.

당시 육군대신 스기야마가 2개월이면 중국을 굴복시킨다고 장담했지만 벌써 2년째가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등화관제와 방공훈련 등 어수선한 서울의 사정을 보고 돌아온 무송은 광주에 내려온 뒤 간척사업을 잠시 잊고 사태변화를 예의주시했다. 간혹 친구를 불러다 바둑을 두며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지켜보았다.

바둑으로 독립자금 지원

그러던 어느날 한 낯선 사람이 무송을 찾아왔다. 곡성에서 사는 박(朴)이 라고 통성명한 사나이는 광주 금융조합에도 근무한적이 있어 무송을 잘 안다며 바둑 소문을 듣고 한번 대국하기를 원해 찾아왔음을 밝혔다.

마침 한가한 시간인지라 바둑판을 대한 무송은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낯선 손님을 자주 대했던 무송은 이때도 별 생각없이 박이라는 사람을 대했다.

그런데 갑자기 박은 윗 주머니안 깊숙한 곳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갑자기 바둑판을 쓸어버린 무송은 다시 흰돌을 집어들고 내기바둑을 청했다. 그의 '바둑은 3급 정도로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기 바둑을 시작한 뒤로 번번히 박에게 졌다. 한집에 백원씩 내기를 건 바둑에서 무송은 무려 수만원의 돈을 잃었다. 나중에 옆에 서 구경하던 은행직원들은 애가 탈 노릇이었다. 간척사업을 한다고 서둘 때라 한푼이 아쉬운 돈이었다. 그러나 밤 늦도록까지 바둑을 둔 무송은 바둑을 끝낸 뒤 박을 문 밖까지 배웅하고 들어 와서도 태연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박 (성명 미상)은 김구의 친서를 갖고 국내 정치자금을 모으러 온 호남지역 독립자금 담당책이었다. 광주 사정을 잘 아는 그는 무송에게 접근하기 위해 수 개월동안 바둑을 배운 뒤 비로서 무송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계속〉

[사진]무송이 주치의 김흥렬의 아우 흥옥의 결혼식 때 주례를 섰을 때 혼인한 가족들과 기념 사진을 함께 찍었다.

사진 중앙이 무송.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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