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 간척사업

1936년 8월. 춘동 간척사업 성공으로 자신을 얻은 무송은 호남은행 목포지점장 최태근(전 중앙여중 · 고 이사장)* 통해 서호 간척사업을 추진토록 했다. 간척사업을 벌이려면 먼저 사업허가서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행정관청과의 교섭이 필요했다.

간척사업 대상지 서호는 당시 육로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곳으로 영암 지역민들의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목포에 가려면 서호면의 성재리와 해창을 거쳐 왕래를 했다.

무송이 과거 동경유학을 떠날때나 광주로 나갈때는 항상 이곳을 통해 목포로 일단 나가 배나 기차로 부산 또는 광주를 향해 떠났다.

무송이 간척사업을 벌이려고 하는 지역은 서호면 성재리와 양장리간 1.2km의 갯펄을 막는 대공사였다. 만약 병목 부분인 이곳만 막게 되면 직선길이 6km, 총면적 9백정보라는 엄청난 규모의 간척지가 생겨날 수 있었다. 벼 수확 1만섬은 거뜬히 얻을 수'있는 규모였다.

항구 이름은 아천포(牙川浦)로 일본에 천자문과 백제문화를 전해준 왕인박사 탄생지 군서면 구림리 성기동과는 지척지간이었다.

그러나 간척사업 허가를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쌀이 부족한 일본은 일본회사를 통해 한국내 간척사업을 벌이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미곡수탈

최태근이 허가서를 얻으려 한창 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 동경의 '오소' 회사가 서호 간척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지리적 조건이 좋은 서호 간척사업의 경우 그 전망이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미곡 증산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대단했다.

1918년 전례없는 쌀 값 폭등으로 큰 소동을 벌인 일본은 1920년 산미증산(産米增産) 15년 계획을 세워 한국 농촌의 수탈에 나섰다. 이 산미증산 발표이후 일본은 매년 막대한 조선산 쌀을 수출이라는 미명아래 일본으로 빼돌렸다.

1910년대 후반 쌀 수출량이 2백24 만섬에서 192Q년대 초에는 3백38만 섬으로, 그리고 1930년초에는 7백37 만섬으로 급증했다.

1934년에는 총 1천6백72만섬의 쌀 생산량 가운데 8백91만섬이 일본으로 수탈돼 갔었다. 피와 땀으로 일귀 놓은 농산물을 일본에 착취당한 한국 농촌의 생활은 비참했다.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일본인의 절반도 안된 5말에 불과했다. 농민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 졌음 은 당연한 결과였다.

만주산 잡곡수입

일본은 한국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조, 수수, 콩 등 잡곡을 만주지방으로부터 들여와 대용식으로 하게 했다. 기름진 쌀을 팔아 거칠고 딱딱한 잡곡을 사서 먹는 꼴이 되었다.

일본은 산미증산 계획을 발표한지 13년(1920년~ 1933)동안 무려 약 5 여만 섬이라는 미곡을 일본으로 탈취해갔다.

이렇듯 쌀 생산에 혈안이 돼 있는 일본이 여건이 좋은 서호 간척지와 같은 간척사업을 한국인에게 쉽게 내줄리 만무했다.

그러나 막상 공사에 나서려던 '오소' 회사는 그만 포기하자 않을 수 없었다. 공사의 타당성 조사를 벌인 결과 수심이 너무 깊고 물살이 거세어 승산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무송은 한편으로 걱정스런면도·있었으나 쾌재를 불렀다.

무송은 결국 최태근에게 간척사업 관계업무를 신속히 처리할 것을 독려하는 한편 자신도 총독부를 찾아 나섰다.

일장기 말살사건

무송이 경성 나들이를 떠났을 때 서울은 마침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 픽대회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진이 동아일보에 보도되면서 일장기가 말소된 사건으로 화제가 돼 있었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으로 제4차 무기정간을 당했다. 당시 동아일보 취체역을 맡고 있던 무송도 방관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태는 의외로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총독부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를 아예 폐간시켜 버리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조선인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그 같은 의견은 묵살됐다. 제호를 바꾸자는 제의도 있었으나 사장직에 있던 고하는 끝내 반대했다.

결국 1년 가까이 실랑이를 벌인 끝에 동아일보 무기정간 사태는 1937 년 6월 2일 사장 등을 바꾼다는 타협 안이 받아들여져 일단락되었다.

[사진]제주도 나들이를 갔을 때 지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무송 (왼쪽에서 다섯 번째)의 모습.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