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동래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하던 무송은 고향에서 간척사업에도 손을 댔다. 바다를 막아 농토를 확장, 땅을 일구려는 그의 꿈은 일찍이 동경 유학시절부터 꾸었던 꿈이었다.

그는 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시험적으로 미암면 춘동리 앞바다 1백정보 되는 경지면적을 막았다. 봄철부터 시작한 공사는 지리적 여건이 좋아 비교적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무송의 이러한 간척사업에 대한 꿈은 부친 현기봉이 돌아가면서부터 구체화되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7천섬 논이 보성, 영암, 무안, 해남 등 각지에 널려 있자 이를 한데 모아 한곳서 1만섬 쌀을 낼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곳에서 쌀 1만섬을 얻기란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더구나 영암에서 적지 장소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다. 문득 동경을 오고 가면서 눈여겨 보았던 고향 앞바다 서호강을 막을 것을 생각해낸 무송은 실험적으로 춘동 간척사업에 나섰다.

서호강 간척사업지는 적어도 9백정보는 족히 넘을 큰 공사였다. 이 공사를 앞 두고 규모가 적은 춘동 간척사업에 먼저 손을 댔다.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은행 업무를 보면서 틈틈히 영암에 내려온 무송은 인부들을 독려하고 제방 쌓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멀리서까지 통나무와 돌, 흙을 운반해 왔다. 규모가 작은 공사 탓에 1년만에 마칠 수 있었다. 무송은 완공되던 날 경성의 친구들을 모두 초청해 현지에서 잔치를 벌였다.

춘동 간척지는 해방후 토지개혁 때 경작자들에게 상환답으로 모두 넘어가버리고 말았지만 경지정리가 안된 당시에는 단일농지로는 꽤 규모가 큰 농토였다.

이 무렵 무송은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는 부인 신종림을 맞아 들였다. 첫째 부인 김희정의 환영을 잊기 위해서도 주변에서 서둘러 주었다. 1933년 당시 신종림은 경성사범을 나온 뒤 강원도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무송은 서울에서 결혼을 마친 뒤 광주로 내려왔다.

도산과의 만남

가정생활과 업무적으로 숨가쁜 생활을 보내던 무송은 1935년이 되어서야 겨우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때 국내의 정세는 여전히 밖으로는 평온한 것처럼 보였으나 안으로는 각 종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서 무송은 도산 안창호가 조국순례를 하면서 광주에도 오리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안창호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상해서 체포된 뒤 국내로 압송, 대전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그해 2월 10일 가출옥된 몸이었다.

오랜만에 고국땅에 돌아온 그는 출옥 하자마자 고향 평양 대동강 하류 도롱섬을 비롯 영호남 지방 순례에 나선 것이다.

도산이 가는 곳마다 인파가 몰렸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도산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금지 시켰다. 그리고 20명이 넘는 자리에서 식사도 못하도록 감시했다.

따라서 도산을 대접할 때는 20명 이내씩 여러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도산이 광주에 내려 왔을 때도 감시는 여전했다. 옥고를 치른 뒤 허익한 몸으로 내려온 도산은 경성의 인촌과 김병로,고하의 소개로 무송의 집에서 묵었다.

무송의 집에서 여장을 푼 도산은 광주의 여러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무송의 집에 묵게 된 도산은 이를 계기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도산이 묵게 된 이후 무송의 호남동 집은 일본경찰들이 삼엄하게 깔렸다. 그러나 함부로 집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일본경찰의 감시 눈초리 속에서 광주 인사들은 안창호로부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다. 김구 국무령의 활동도 들어 알 수 있었다.

병 보석 후 가료중 끝내 숨져

무송의 집에 머문 동안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밝힌 도산은 순천을 거쳐 부산으로 떠났다. 도산이 떠나기 전날 무송은 최영욱 등과 환송연을 베풀었다. 최영욱은 해방직후 군정당시 전남 초대지사를 지낸 인물로 그 무렵 미국유학을 마치고 황금동에서 서석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동안 일본 말을 안써 꽤 미움을 받던 인물이었다.

부산으로 떠난 도산은 그후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 간 뒤 평남 대동군 대보면 대보산에 송태산장이란 조그마 한 집을 짓고 기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37년 6월 28일 송태산장에서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그는 갖은 고문을 받고 병보석으로 나온 뒤 경성 제국대학병원에서 입원 가료중 숨지고 말았다.

1938년 3월 10일 자정에 운명한 도산의 병실은 쓸쓸하기만 했다. 반민족이라 일제에게 낙인찍힌 그의 병실을 찾기를 서로 꺼려 했기 때문이었다.

무송은 도산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다. 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도산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 았던 무송은 인생의 허무함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계속〉

[사진]호남동 집에서 함께 한 무송의 자녀들. 왼쪽으로부터 3 남 영원, 장녀 영순, 3녀 영오,장남 영익, 2남 영식의 어린 시절 모습.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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