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의 부름을 받고 상경,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잠시 달래고 온 무송은 다시 은행일에 몰두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또다시 민족계 은행들에 대해 일본 자본 지배하에 두려고 합병 등을 꾀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민족계 은행이 순조롭게 운영되면 바로 이 은행을 발판으로 민족기업이 육성될 뿐만 아니라 민족은행의 자금원이 된다고 해서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은행합병의 수난

이미 1928년에는 신은행령을 공포, 민족은행들에 대한 경제 침투 발판을 굳혀 놓기도 했다.

새로 공포된 은행령으로 삼남은행 (1928년), 북선상업은행(1933년) 등 이 조선상업은행으로,흡수 합병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조선상업은행은 1925년 조선총독부의 간계로 은행장 조진태가 물러 나고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이었던 和 田一郞이 총독부의 손귀에서 놀아났다.

이밖에도 한일은행이 호서은행을 1931년 흡수,동일은행으로 새로 태어났다. 이 은행 역시 총독부의 계략에 의한 강제적인 합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초 세계 대공황이 일기 시작한 때여서 한반도의 재력이 약한 민족은행들은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내에서도 금융공황에 대비하는 정책이 이뤄지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은행들에게 실시한 당시 금융정책은 경제공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이용, 일본 자본은행과의 통합 또는 일본 자본 참가 등을 종용하는 등 은행 경영권을 장악하려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호남은행과 같은 재력이 튼튼한 은행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경남 동래은행과 같이 자본금이 미약한 은행은 합병의 위협을 계속 받았다.

재정난에 처한 동래은행

1933년 호남은행은 동래은행으로부터 흡수 권유를 받았다. 다른 일본자금이 침투된 은행에 합병되기 보다는 호남은행과 같이 순수한 민족은 행에게 넘기고 싶다는 취체역 회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호남은행은 자본금 1백50만원 중 1백12만5천원에 달하는 제3회 불입주금을 이미 1929년에 마칠 정도로 기반이 튼튼한 은행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래은행의 사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취체역 회의를 소집한 무송은 흡수문제 여부를 신중히 논의했다.

호남은행 취체역 회의는 동래은행을 일본계 은행으로 넘겨주는 것 보다 호남은행에 합병시키자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해 4월 4일 주식희사 동래은행측과 흡수,합병한다는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동래은행은 설립 16년만에 은행업무를 호남은행에 넘겨 주었다.

1918년 세계 제1차대전중 경기호황에 힘입어 동래지방의 산업육성을 지원한다는 목적아래 지방유지 윤병준,추종엽,박인표, 오태환, 김형찬 등의 발기로 설립된 동래은행은 일제의 경제침략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경남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에서 영업을 개시한 동래은행의 자본금은 50만원. 그동안 거창지점을 낼 정도로 번창한 때도 있었으나 환경의 변화와 은행령 개정으로 소규모 자본은행으로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문을 닫게 된 사례에 속한다.

이로써 호남은행은 미국이 경제공황 타개를 위해 '테네시' 계곡 개발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킨지 12일만인 5월 30일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동래은행 흡수 합병에 관한 안건을 통과 시켰다. 이어 7월 20일 주식회사 동래은행을 흡수 합병한 호남은행은 합병으로 인해 자본금이 50만원이 더 불어나 총 자본금 2백만원이라는 규모의 큰 은행으로 성장했다.

합병 이튿날인 21일에는 동래은행이 당초 갖고 있던 거창지점의 문을 다시 열어 호남은행은 총 6개의 지점망을 갖추게 됐다.

결국 호남은행은 동래은행의 합병으로 영업대상 지역이 영호남 3개도를 망라하는 민족은행으로 거듭 성장하게 되었다.

무송이 1925년 두취(頭取)인 대표 취체역에 취임한 이래 끊임없이 기울인 노력의 결과였다.〈계속〉

[사진]1933년 호남은행에 합병된 동래은행 본점 영업소 전경과 동래은행 초대 두취인 윤병준씨의 생전 모습.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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