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이 낳은 근세 최대의 정치 지도자 낭산 김준연(金俊淵, 1895 ~1971)선생의 생가 터가 잡초와 나무만 무성한 채 방치되고 있어 생가복원 등 성역화 사업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다.

영암공용터미널에서 군서방면 의 영암읍 교동리에 위치하고 있는 낭산의 생가 터는 왜소한 푯 말이 하나 설치되어 있을 뿐이며 그나마 풀밭을 헤치고 논두렁을 지나 약 2백여미터 쯤 올라가야 겨우 발견할 수 있는 등 외지안 들이 찾기에는 힘든 실정이다. 〈사진〉 특히 겨우 생가터를 발견했다 손 치더라도 표지판 등 안내판이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이곳을 찾는 외지 탐방객들에게 큰 실망 을 안겨주고 있다. 최근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과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이곳을 찾는 외지 인들의 발길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나 영암이 자랑하는 정치인의 생가 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하게 방치돼 있다.

영암읍에 사는 김모씨(55)는 " 영암에 이웃한 해남군의 경우 인기리에 방영됐던 허준 드라마 촬영지의 초가집을 잘 이용해 관광객 유치에 나서 톡톡히 특수를 누리고 있으나 영암군의 경우 근 세 최대의 지도자 낭산 선생의 생가 터를 그대로 방치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 고 있다"며 "역사적인 인물의 생 가 터를 잘 복원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적극 나서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영암읍 교동리 낭산 생가 터 입구에서 살고 있는 박대규씨 (81)는 "낭산이 생존해 있을 때 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으 며, 낭산이 서울에서 집에 내려 오기라도 하면 경호차량들이 쪽 늘어서 구경거리가 됐었다"며 회고한 뒤 "지금은 간혹 이곳을 찾 는 사람이 있으나 후손들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대나무만 무성하게 자라 초라하게 방치돼 있어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 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낭산은 이곳 교동리에서 1895 년에 태어나 영암보통학교 보습과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던 1910년까지 15년여 동안에 걸쳐 생활했던 터전이다.

한편 낭산은 영암초등학교와 명문 경기고,동경제대, 독일 베르린 대학을 나와 조선일보에 입사,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해외 특파원을 지냈으며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민족의 정론을 폈다. 특히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과 ML당 산건, 홍업 구락부 사건 등으로 일제때 7년의 옥고를 치른 항일 독립투사로 활동했으며, 해방후 제헌 3-6대 의원과 헌법기초위원, 법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민족의 선각자로 추 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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