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송은 체육계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각종 지원활동을 아끼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일보사 주최 남 조선축구대회다. 당시 조선에서는 각 종 운동경기가 활발하게 펼쳐졌다. 3.1 운동이후 각종 문화,체육단체가 생겨 나 이를 통해 울분을 토로했다. 무송은 경성이남 지역의 축구대회인 제1회 남 조선축구대회 대회장을 맡았t다. 대회 장을 맡은 무송은 우승기를 제공하는 등 대회경비 일체를 부담했다. 제1회 대회는 1931년 8월 20일 광주고보 운동 장에서 열렸다. 참가팀은 모두 12개팀 으로 광주 3개팀을 비롯 고창, 슨천, 담양, 목포,영광, 구례,정읍,이리 등지 에서 까지 참가했다. 이때 축구선수로 는 박형렬, 박재영,김남전, 서형남 등

축구인 들이 끼어 있었다. 이후 11년동 안 계속된 대회에 해마다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무송은 이외에도 조선인들 의 친목 체육대회가 열릴 때면 언제나 재정적 지원을 했다. 당시 다른 부자들 에게서는 볼 수 없는 관심이었다.

지극히 소탈했던 무송

-무송의 일상 생활은 극히 소탈했다. 한복을 즐겨 입었던 무송은 공식석상 이외에는 양복을 거의 입은 법이 없었 다. 그리고 한복이라도 회색빛 옷을 즐 겨 입었다. 이유는 흰옷은 자주 빨아야 하기 때문에 주부들의 일감을 덜어주 고자 하는 배려에서 나왔다고 한다.

무송은 식성에 있어서도 매우 소탈 한 편으로 젓갈을 좋아했던 그의 집에 는 어란,창젓,굴젓,새우젓 등 진귀한 젓갈이 항상 구비돼 있었다. 손님이 갑 자기 들이닥칠 때는 밑반찬이 있으면 주부들의 고충을 덜어줄 수 있다는 생 각에서 계절마다 장만해 놓도록 한 때 문이다.

의외로 간소한 밥상을 보고 난 손님 은 그의 소탈함에 놀라는 사람이 많았 다고 한다. 이처럼 상차림과 한복에 관 한 일화를 많이 남긴 무송은 자녀들의 가정교육에 있어서도 매우 엄한 편이 었다. 진사 벼슬을 지낸 부친의 유교적 가풍 영향도 컸다. 무슨 일이나 사리를 따져 자식들을 지도했다.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구두쇠 소리를 들을 만 큼 검소한 생활을 강요했다.

이에대해 3남 영원씨(신한해운 사장 역임)는 선친에 대한 회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친이 저희들을 대하는 태도는 무 척 엄했습니다. 무슨 일이나 사리를 따 져 우리들을 지도했죠 또 우리들에게 나 부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선 구두 쇠 일만큼 검소했습니다. 오죽하면 형 제들이 고학생들에게 선뜻 내주는 50원을 보며 부러워 했겠어요. 그러나 은 행수위나 집안에서 일보는 이들이 아 플때면 꼭 우리들을 데리고 문병을 가 '죽으면 아들들을 은행에 쓰겠다'며 위로를 하곤 했는데 당시로선 못 느꼈 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이게 다 우리들을 교육시키려는 것이었어요"

부인을 잃다.

평소 금슬이 좋았던 무송은 부인 김 희정을 일찍 잃었다. 1932년 7월 26일 난산 끝에 사랑하는 부인을 그만 잃게 된 무송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인이 망할 당시 무송은 서울에 있었다. 마침 장모의 제사가 있었기 때 문이다. 당시 출산일이 임박했던 부인 은 무송이 집을 떠날 때 까지만 해도 괜찮았으나 밤이 되면서 진통이 심했 다. 그래서 광주에서는 최초의 여의사 로 명성을 날렸던 현덕신을 불러 진료 를 받도록 했으나 결국 새벽 3시께 부인 김희정은 그만 고통에 못이겨 졸도 하고 말았다. 당시 중앙병원장이었던 주치의 김홍렬씨를 다시 불러도 보았으나 속수무책,대학병원에 까지 옮겨 간 김희정은 결국 병원에서 숨지고 말 았다. 호남은행 설립의 어려운 시기를 내조하다 돌아간 부인을 잃은 가족의 슬픔은 컸다.

부인을 잃은 슬픔에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던 무송은 어느날 인촌으로부터 서울에 한번 다녀가라는 전화를 받 았다. 몇 개월전에 인수한 보성전문학 교 구경도 할 겸 바람쐬러 오라는 것 이었다. 마침 기분도 울적하던 무송은 서울 나들이를 떠났다. 서울에서 .활동 하고 있던 김용무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무송이 대준 장학금으로 동경유 학을 마친 뒤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 다. 인촌이 보성을 인수하는데 고하와 함께 인수단의 한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1932년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인촌은 민족사학으로 키울 꿈 에 부풀어 있었다. 중앙학원 재원까지 끌어 들여 학교 확장에 여념이 없었다. 그 무렵 보성은 최두선을 재단법인 실 무 책임자로 선임하는 한편 인촌 자신 은 교장으로 취임한 직후였다. 보전 제 10대 교장으로 취임한 인촌은 그후 해 방이 되도록 까지 약 2년간을 제의한 13년을 줄곧 교장직에 재임,민립대학 의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나중에 무송도 보전의 감사역을 맡 으면서 인촌의 교육열에 큰 감동을 받았다.

[사진]금슬이 좋았던 무송은 1932년 7월 26일 부인 김희정을 잃었다. 부인이 사망하기 얼마전에 찍은 가족사도 무송(맨 뒤쪽)고[ 부인 김희정, 그리고 아들 영식, 영원이 보인다.<계속〉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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