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 무송은 광주학생 독립운동 학부형 교섭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11월 3일 거사가 일어나자 경찰은 감짝 놀라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했다. 남녀 학생 구별없이 무차별적으로 잡아가둔 경찰은 코에 물을 붓고 고춧가루 물을 먹이는 등 고문을 서슴차 않았다. 이 사실은 안 무송은 광주고보 학부형들과 연락, 긴급 학부모회의를 연 뒤 학생석방 교섭위원회를 조직했다. 스스로 교섭위원장직을 맡은 무송은 고문 금지와 학생들을 석방해 줄 것을 경찰당국에 건의했다.

무송이 나서자 경찰은 고문의 수위 를 낮추어 가며 학생들을 재판부로 넘기기 시작했다. 경찰당국은 무송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위원회를 조직해 활약한 덕분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부친 학파 묘 광주 이장

1930년 무송은 혼란스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부친의 묘를 삼호면 서창리 선산에서 광주 학강정(현학운동)으로 옮겼다. 8월14일(음력) 큰 화물차에 차려진 상여행렬 뒤로 15 대의 이장대열은 당시에는 보기 드문 장례행렬로 주위의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연도변에는 많은 영암지 역민들이 나와 운구행렬을 구경했고 큰나무와 전선으로 인해 운구차가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때는 동 행한 전기기사와 인부들이 동원돼 전선줄을 끊고 다시 잇기도 했다.

운구차 행렬이 광주로 들어서자 호남의 유력자로 급부상한 무송와 위 용과 학파의 마지막 자취를 보러 수 많은 인파들이 거리로 나와 이장행 렬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때 무송은 구경나온 인파에게 집에서 빚은 술과 떡을 푸짐히 나누어 주기도 했다. 무송의 부친에 대한 효심은 당시 큰 화젯거리가 됐다.

새로 이장해 옮긴 광주시 학운동의 묘소는 천하풍수도 무릎을 쳤다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잠두혈(麗頭穴)이라는 것이다. 이는 누에 가 실을 뽑는 듯한 형상으로 무송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자리였다. 묘지 바로 앞쪽으로는 명산 무등산이 마주 보고 있다. 무송은 부친의 유골을 광주로 모셔온 뒤 명필 오세창의 휘호를 받아 묘비를 세울만큼 부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어대전 사건

부친의 묘를 광주로 옮기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던 무송은 출장소에 서 지점으로 승격된 장성지점과 보성 등지에 지점을 낼 준비로 분주했다.

또 3월에는 감사역 박하준의 아들 용철이 김영랑, 정지용 등과 시문학 을 창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올라가는 틈을 이용, 이들을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이때 이난영의 '목포 의 눈물' 이 출반돼 전국적으로 선풍 적인 인기를 모았다.

1931년에 들어 무송은 또 하나의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다. 이번에도 도평의회 석상에서 벌어진 발언이 문제가 된 사건으로 어대전(御大典 · 즉위식) 기념식수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1928년 소화(日和) 가 즉위하면서 전국에 기념식수를 했다. 광주에도 공설운동장(현 양동시장)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무를 조선 어린이들이 함부로 꺾는데서 말썽이 생겼다. 결국 도평의회 회의석상에서 까지 문제가 되어 비난의 초점이 됐다.

''죠센징이 한일합방후 잘 사는 것은 다 천황폐하의 은혜인데 어대전 기념식수를 뽑는 것은 사상이 불온 한 것이 아니오:" 일본의원들은 하나같이 공격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무송이 벌떡 일어나 일본 의원들을 향해 반박을 했 다. "죠센징이라뇨: 말씀을 삼가 주기 바라오. 그리고 사상 불온이란 말은 온당치도 않소. 어린애들이 무슨 사상을 알겠소."

무송의 이같은 발언은 또다시 문제가 되어 광주번영회장, 금융조합 이사직 등 모든 공직에 대해 사표를 내 버렸다.

그러나 이 사건도 지사 등 몇몇의 중재로 화해에 나서게 됐지만 나중 에 화셋거리가 되었다. 〈계속〉

[사진]영암군 산호면 서창리 선산에서 광주시 학운동으로 이장한 무송의 부친 학파의 묘소 누에가 실을 뽑는 듯한 형상의 이른바 잠두혈(잠두혈)이 라는 몀당자리를 잡기 위해 무송은많은 애를 썼다.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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