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지사 김서규는 무송의 집을 방 문하자 사직서 반려를 종용했다.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 무송에게 자신의 체 면을 위해 사직서 만큼은 철회해 주도록 요청한 것이다.

무송은 결국 김서규와 함께 나라 잃은 설움을 공감하며 '사까구찌' 사건과 같은 일이 더 이상 없는 조건아래 사직서를 철회했다. 그러자 사까구찌 도 곧바로 무송을 찾아와 사과했다. 이로써 도평의회 회의에서 발생했던 황 실불경 사건은 8개월만에 일단락됐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총독부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게 됐으며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신임 지사는 무송과 서로 우호적인 관계속에서 조선인의 차별대우를 막는데 힘을 보랬다.

학생사회의 동요

도평의회의 석상에서 무송의 발언이 승리로 돌아가자 조선인들의 기세 는 높아졌다. 우리 민족에게 불리한 안건이 논란이 될 때는 대부분 부결에 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때 광주의 학생 사회에서도 서서히 민족정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1926년 9월 25일에는 이미 광주고등보통학교에 비밀단체 성진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학제개편으로 얼마전 없어진 광주 서중의 전신인 광주 고등보통학교는 3.1 운동이 있은 5개월 후 1919년 7월 무송의 부친 학파 현기 봉을 비롯 김형옥,유강렬 등 유지가 중심이 되어 설립 기성회를 조직, 이듬 해 5월 1일 개교를 본 사립학교였다.

당시 광산관(光山館: 전 무등극장 자리)에서 개교를 한 광주고보는 1922년 관립으로 이관되면서 광주시 누문동 현 교사(광주일고)로 옮겨왔다. 1927년 성진회는 신간회 등 사회단체 와도 연락, 애국정신을 서서히 학생사 회에 일깨웠다. 성진회가 발족되기까지는 여름방학'을 이용, 광주고보 5학년들이 강진군 병영면에서 한글강습회를 열고 문맹퇴치에 나섰다가 퇴학을 맞은게 직접적 원인이 됐다. 한글을 가르친 것은 불온 사상에서 나왔다해서 당국은 학생들을 퇴학시킬 것을 학교에 종용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에 반발, 애국심이 투철한 학생 몇몇이 모여 성진회를 조직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진회는 주축을 이뤘던 학생들이 졸업을 하면서 자연 해체돼고 1927년 11월 광주고보 농고 사범학교생이 다시 모여 민족문화 연구 목표 독서회를 발족했다.

이러한 학생들 사이에서 이뤄진 독립 정신은 1929년 6월 26일 나주에서 광주로 가는 통학열차 속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광주학생 사건으로 이어졌다.

11월 3일 명치절을 기해 조직적으로 일어난 학생사건을 취재하러 중앙 각 신문사에서는 기자들을 특파했다. 조선일보사에서는 24세의 최인식이 판견 되었다. 이때 무송은 드러내 놓고 돕지는 못했지만 심정적으로 크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무송의 집에는 정체불명의 편지가 이즈음 날아 들었다. 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는 곧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이 닿은 국내책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대어 주라는 편지들이었다.

무송은 이런 편지들이 올 때마다 마다않고 요청한 자금을 모두 송금환으로 보냈다. 당시 심부름은 문봉근(문영택 전 대법원 연수원 판사 부친, 무송 내외종간)이 맡아 했다.

채인식과의 만남

이같은 내용을 눈치 챈 채인식은 광 주학생 사건이 중앙에서 보도 금지되자 취재를 팽개치고 서울에서 학생사 건을 다시 일으킬 것을 동경상대에 재 학중인 장석천과 결의, 자금조달을 위해 무송을 찾았다. 그러나 최인식 등이 무송을 찾았을 때는 마침 목포지점으 로 줄타중이었다. 무송을 만나지 못하자 호남은행 취체역이자 신간회 전남 지회장인 정수태(정래혁씨 선친)를 만난 이들은 비밀리에 일금 5백원을 얻어 가지고 서울로 올라 갔다.

인촌을 찾았으나 1주일전 유럽으로 떠났다는 얘기를 들은 이들은 종로구 원서동 송진우를 찾았다. 강영석, 이환발(나주 제헌국회의원),최인식 등이 12월 중순 고하의 집을 찾았을 땐 마침 장덕수,최창학, 현상윤 등이 함께 모여 시국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옆방에서 만난 최인식은 자초지종 을 얘기하고 거사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고하에게 요청했다.

그러자 고하는 화를 내며 돈이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평소 들어왔던 고하의 태도와는 너무 딴판이었다. 크게 실망한 이들이 밖으로 나설 때 최인식의 등을 두들긴 고하가 '*저녁도 안 먹고 돌아 다니는 친구들도 있구 먼"하며 호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 주었다. 불만을 간직한 채 밖으로 나오 려던 최인식은 고하가 조금전 손을 넣은 호주머니 속으로부터 삼천원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이들은 깜짝 놀랐다. 그때서야 고하의 참 뜻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최인식 등이 요구한 3천원은 현상윤, 최창학 등 사회유지가 보는 앞에서 저녁 밥값이란 명목으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 3천원 이면 서울에서 5칸 기와집을 살만한 돈이었다. 장석천과 최인식 등은 이 돈을 1930년 1월 4일 일어난 전국학생사건 자금으로 사용했었다. 이후 이들중 완도출신 장석천은 일경에게 곧 체포 됐으나 입을 다문 바람에 배후자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광주에 내려온 고하로부터 전해들은 무송은 최인식에 대해 주의깊게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최인식과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계속〉

[사진]식민지 시대 일본의 철저한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총독부. 한 · 일합방전의 왜성대 (사진 중앙)와 3.1 운동후 총독부 건물(사진 하).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무송과 교분을 갖고 지냈던 최인식씨.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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