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괴로웠던 일제치하에서 그는 덕진초등학교 6학년 때에 8.15를 맞이했다.

일제치하에서는 운동장을 파서 방공호를 만들었고 운동장을 식량대용작물 고구마를 심어서 피땀 홀려 지은 벼농사는 공출이란 미명하에 전부 거두어가 군량미로 충당 국민들은 피골이 상접한 허구진 세월을 보내다 8.15 해방이 닥친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우리나라의 정세는 미군과, 소련군의 주둔으로 38선 남북으로 갈라져 이남은 미군의 편으로 민주주의가, 이북은 소련군이 주둔한 관계로 공산주의로 우리나라는 본의 아니게 좌ㆍ우익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제주도 폭동사건, 여순반사건으로 각 지역에서도 좌우의 다툼은 치열해져 갔다.

영보지역은 금정 내산으로 연결된 산맥으로 밤이면 밤손님(좌익운동가)이 가끔 선량한 농가에 와서 식량이며 반찬들을 가져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영암경찰서 습격이란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기 위해 그날 밤 그를 데려 갔다. 그러나 경찰서 습격은 실패로 끝나 반격에 나선 경찰의 총탄에 맞았다.

등허리에서 배꼽부위로 총탄이 관통된 상태였으나 밤에 누구하나 부축한이 없이 피신해 있다 다음날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합법적으로 병원에 갈 수도 없고 집에서 호박찜 등 단방약으로 그 상처가 나아갔다. 등 허리에서 배꼽부위로 관통을 하고서도 또 원래 총상을 입으면 물은 절대 금물이지만 물을 먹었으니 그러고도 죽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으니 생명이 길다 할까 그리하고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다음해인가 6.25사변이 났다. 그 때 그의 나이 21세 한참 때였다.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서 다시 후퇴하면서 그를 의용군으로 끌고 갔다.

중부지방까지 끌고 가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그는 유엔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시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보내지게 되었는데 그는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와 얼마 후 결혼했다. 이후 그는 떳떳한 3년여의 군대생활을 거쳐 제대 후 평생을 농사에 전념했으나 운명은 그를 놔두지 않았다.

병원진찰 결과 간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결국 지난 7월 25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살아있을 때 많은 이로부터 참 좋은 사람이란 평을 받았다.

묘역 일을 끝낸 후 나는 그의 6남매 내외를 노인정 한곳에서 불러 놓고 아버지의 생애에 추호도 누가 되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최규용 덕진면 영보리 노인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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