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용운의 낭독으로 불 길이 당긴 3.1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 져 나갔다.

일제는 결국 3.1 운동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무단정치에서 소위 문화정치 라는 외형적 정책변화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무송은 때가 왔음을 알았다. 지금까 지 민족은행 설립에 고의적으로 회피 를 해온 총독부도 이런 분위기 속에선 반대만의 거절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눈은 약소국 한국으로 눈길이 집중됐다. 이에 일본은 세계여론에 짓눌려서도 문화정치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변하는 주변 정세

이즈음 일제는 겉으로는 희유 무드를 조성하면서 경제적 측면에서는 실리를 추구하는데 분주했다. 그들은 1차대전을 계기로 점차 부풀어 오른 자국내 독점 대자본을 중국 등 인접 대륙으로 수출했다. 식민지 조선에도 원시산업과 노동력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많은 자본을 들여왔다. 싼 임금의 노동력 착취로 경제수탈을 꾀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일본인들의 절반도 못되는 임금을 지급하면서 10시간이상 12시 간까지 일을 시켰다.

당시 한국에 본점을 둔 일본의 자본회사는 1917년 20개 회사였던 것이 1919년에 이르러 100개 가까이 늘어났다. 여러 측면에서 한국을 지배하려 했다.

이러한 일제의 움직임에 대해 조선의 기업가 사회에서는 은연중 반발, 민족기업을 육성하려는 새로운 움직 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많은 회사들이 3.1 운동 이후 생겨났다.

무송의 부친 현기봉도 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4월초 무송의 도움을 얻어 현기봉은 서울 상인과 합작해 동물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자본금 30만원(円)으로 세운 해동물산은 주 로 내외물산의 수출입과 위탁판매를 영업목적으로 하는 회사였다. 취체역 사장은 현기봉이 맡았고 본사는 서울 봉래동에 두었다. 당시 봉래동은 남 대문에 이르기까지 객주 여객이 운집 해 있는 서울서도 번창한 상가지역이 었다.

무송은 회사 설립시 부친에게 친구인 김병로와 윤정하를 경영진에 '참여시킬 것을 권유했다. 현기봉은 자식의 뜻이 어디에 있는 줄 잘아는 터라 두말없이 윤정하를 취체역에 가인을 감사역으로 참여케 했다.

해남이 고향인 윤정하는 무송과 같은 무렵에 일본 동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한성상업회의소(한국인상업인단체)에서 창간한 상공월보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여러 민족지에도 자주 글을 투고하면서 한국 상업계의 혁신을 위한 계몽운동 전개에 힘쓰고 있었다. 전북 순창 출신인 김병로(초대 대법원장)는 13년 메 이지대학을 졸업한 뒤 경성법전과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무송을 만날 즈음에서는 변호사 개업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다. 그는 창평 영학 숙이 인연이 돼 동경시절 무송과 절 친했지만 일찍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에 눈뜬 지사 (志士)풍이 다분했다. 을사조약 당시 엔 용추사에서 최익현의 열변을 듣고 어린예에 규합, 순 창읍 일본 보 좌청을 습격한 일도 있었다.

이즈음 무송은 가인, 윤정하 등과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에 은행설립에 따른 구체적 문제를 논의했다.

호남은행 발기인 총회

무송은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정책 방향 전환 시점에서 은행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1919년 6월 중순께였다. 우선 김상섭, 윤정하, 차남진 등과 만나 은행창 립 발기인 구성에 나섰다. 부친 현기 봉의 협조로 이미 광주의 유지들과도 협력관계가 이뤄져 은행설립 발기인 구성은 시간문제였다.

무송이 광주, 목포간을 뛰어 다닐 때 마침 인촌이 전남에 내려왔다. 경성방직 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촌은 1917년 중앙학교를 인수한 뒤 곧 민족사업을 육성한다는 뜻에서 1911년 창립, 재정난으로 경영이 어려운 경성직유주식회사를 도산 직전 인수한 터였다. 그러나 빈약한 시설로는 밀려드는 일본산 직포와 경쟁을 할 수 없어 새방직회사 경성방직 설립을 꿈꾸고 그동안 꾸준히 총 독부의 눈치만 살펴오던 터였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인의 자본으로 당시 회사를 설립하려면 회사령에 묶여 쉽사리 설립인가를 받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즈음 들어선 3.1 운동이후 회유 무드와 또 1차대전 이후 급작스 레 부흥한 일본자본의 해외수출 붐에 따라 조선인에게 규제됐던 회사령이 철폐의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일본은 이때 이미 축적된 국내부로 경제공황의 기미가 보였다. 무송이 본격적으로 은행설립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이 분위기를 남보다 먼저 감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호남의 유지들은 농공은행이 식산은행으로 흡수된 뒤 크게 실망하고 있었던 터였다. 특히 현기봉, 김상섭 등은 크게 분개, 광주농공은행이 없어질 당시 새민족은행 설립을 꿈꾸기 까지했다. 따라서 무송이 은행설립 얘기를 꺼냈을 때 이들 두 사람의 협조는 누구보다 컸었다. 다른 유지 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송은 드디어 지방산업 육성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유지 24명의 협조로 주식회사 호남은행 설립을 발 기했다. 이때가 1919년 7월 20일이다. 당시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은 광주 에서 정낙교, 지응현, 김형옥, 조만선, 최선진, 최종남, 최석휴, 주하영, 박하 준 등 9명이다.

목포에서는 현준호, 김상섭, 차남진, 김원희, 김성규 등 5명이 서울에 서는 김성수, 김병로, 오상현, 윤정하 등 4명이 각각 참여했다.〈계속〉

[사진]1918년대의 목포항. 일찍 개항으로 활기를 띤 목포는 전남에서 생산되는 각 종 농수산물의 수출함구였다.〈사진 왼쪽〉3.1 독립선언문 이 낭독되었던 태화관의 모습.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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