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적인 경작권을 빼앗긴 한국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례.나주 등지에서는 하루아침에 식구들의 생명줄인 농토를 빼앗겨 자살 한 사람도 있었다. 이렇듯 한국의 땅들은 동양척식회사를 비롯 후지흥업, 가따꾸라, 히가시야마, 후지이 등의 일본 토지회사와 이민들에게 무상 또는 싼값으로 불하됐다.

무송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 다. 동경시절 고하에게 들어서도 잘알고 있었지만 귀국 후 두달동안 이곳저곳 다니면서 농민들의 참상을 잘 보았다. 이는 그가 동경에서 막연히 느꼈던 민족자본을 형성해야 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계기가 됐다.

무송이 이렇듯 경제적 측면을 생각하게 된 것은 정치권력을 저들에게 빼앗긴 이상 경제력이라도 부흥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인촌의 영향도 컸다.

당시 나라를 생각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구국운동을 벌인다고 해외망명이나 여러 정치적 사건에 관련됐을 때 인촌은 이에 못지 않게 교육의 중요함을 역설 홀로 고군 분투하는 모습을 무송은 옆에서 감명깊게 지켜보았다. 정치 아닌 다른 곳에서도 할일이 있음을 무송은 인촌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민족기본 형성이라는 데서 자신의 할 일을 비로서 발견했다.

당시 목포에 점포를 둔 은행으로는 1898년 동경 제일은행이 최초의 지점 으로 설치된 이래 1909년 한국은행으로 인계된 뒤 합방되면서 개칭된 조선은행이 있었고, 1906년 개점한 주식회사 18은행 목포지점의 일본은행, 광주 농공은행 목포지점이 각각 있었다.

총독부의 착취

1918년. 총독부의 무단정치는 더욱 심해만 갔다. 조선의 지식인이 두명만 모여도 비밀경찰들을 풀어 사찰을 강화 했다. 특히 동경 유학생들의 감시는 더욱 철저했다. 그도 그럴것이 동경유학 생 출신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대가 그동안 많이 발생됐기 때문이다. 이처 럼 당시 일본제국은 조선인의 독립사상 을 뿌리 뽑고자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는 항일투쟁이 계속 번져 나갔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했던 광 복단사건도 그중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상진, 채기중, 장두환 등 이 광복단을 조직하여 조선 각지의 부호들에게 국권회복운동 자금을 요구하는 통고문을 10월에 보낸 뒤 이에 불응한 대구의 부호 장승원 등을 국민의 이름으로 살해한 사건으로 총독부를 경악케 했다. 당시 부호들은 일본인들의 동조자로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는데 친일 파 부호를 잃은 총독부는 전국의 헌병 대에 광복단 체포 총 비상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비상망 속에서도 친일 부호들이 계속 죽어 나갔다. 그래서 친일 부호들의 주변에는 일본 경찰들이 깔 리기 시작했다.

이 부호 암살자 명단에는 무송의 아버지 현기봉도 지주라는 명목으로 광복단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자객들 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각지 부호들에게 접근해 국권회복운동 자금모금 통고문을 이들에게 1차 보낸 뒤 이를 거절할 경우에는 친일부호라는 이유로 가차없이 살해했다.

그러나 부친이 이같은 사실을 알리 없었다. 여전히 농공은행이 일본인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악화되기 시작한 재정상태가 그리 쉽게 풀려나지 않자 동분서주 뛰던 현기봉도 그만 지쳐 무송을 데리고 영암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일본 상인들의 농간

당시 전남도민들이 이용한 금융단체는 광주농공은행 외에도 광주 금융조합이 있었다. 농공은행 설립 1년 뒤 1907년 발족된 광주 금융조합은 한국 금융조합의 효시로서 역시 초창기엔 호남농민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본래 영세 농촌자금을 흡수하기 위 해 설립된 농공은행이 다소 지주급을 상대로 했던 것이라면 광주 금융조합은 완전히 서민을 위해 세워진 금융기 관이었다. 일본에서도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은행으로 한국의 전래 계(契)와 덴마크의 협동조합을 본떠 만든 조직 이었다. 그러나 창설자가 오꾸무라 이 호꼬란 일본인 여자로 나중에는 일본의 한국농촌 수탈의 대표적 수단으로 하나로써 이용되어 농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18년 10월 1일. 창립된지 12년만에 광주.한호.함경.평안.경상.전주 등 전국 6개 농공은행은 악화된 재정상태 때문에 총독부가 세운 특수은행 조선식 산은행에 흡수되는 비운을 맞게 됐다.

이때 현기봉은 영암집에서 두문불출 하고 있었다. 조선 식산은행은 미지마 (三島太.)를 두취(頭取)로 맞아 1천만원(円)의 자본금으로 출발한 산업개발 목적의 은행이었다. 그러나 창립 당시 부터 철저히 민족경제의 침락대 앞장 서는 역할을 했다. 한국인에 대출은 거의 없었다.

전국에 60개소의 지점을 두고 행원 1천200명을 거느린 식산은행은 동척(東 拓)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으며 성장해 갔다. 농공은행에 참여한 한국인 유자 들의 분노가 컸음은 물론이었다. 당시 광주농공은행 설립에 참여한 인사는 현기봉, 김성규, 박원계, 최상진 등이었 다. 세계대전의 호경기 아래 자금이 필 요로 할 당시 한국인 기업가들에 대한 당시 일제의 자금동결은 큰 타격이었다.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은행의 실권을 일본인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은 물건을 배에 선적해 놓고 운임비가 없어 헐값으로 일본 상인들에게 넘기는 등 일인들의 농간에 놀아나야 했다.〈계속〉

[사진]1906년 개점한 주식회사 18은행 목포지점 건물 전경〈사진왼쪽〉과 광복단 사건을 계기로 시가지 경비를 삼엄하게 펴고 있는 일본군과 경찰.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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