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월 15일. 현씨 집안으로서는 이날은 커다란 경사의 날이었다. 환갑 이 넘도록 손자를 보지 못한 현진사의 원(願)이 풀어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2년만에 무송은 첫아들 영익(永 翊)을 얻었다. 동경으로부터 득남 소식을 전해들은 현 진사는 빨리 귀국하라 고 무송을 재촉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이광수가 쓴 장편 ‘무정’ 이 매일신보 에 연재돼 한창 화제를 뿌릴때였다. 부인 김희정이 동경미술전문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머물고자 했던 무송은 부친 의 성화에 못이겨 유학생활 6년만에 귀국했다. 단순히 신학문을 배우기 위 해 건너간 일본의 유학생활은 그게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다. 인촌, 고하 등 주변인물의 영향도 컸지만 동경생 활은 무송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종종 농공은행의 앞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은 무송은 조선인의 손에 의해 이뤄지는 민족자본 형성에 대해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전국에 가지를 뻗친 농공은행은 총독부의 재정정책에 의해 설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순수한 민족 자본 은행은 아니었다. 무송은 귀국 1년전부터 법학공부보다 일본의 재정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특히 옛날부 터 관심을 가졌던 은행관계 업무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관부(關釜) 연락선에 몸을 실은 무송은 남다른 감회에 빠졌다. 새생활이 시작될 고국을 향해 동경의 생활을 훌훌 털고 목포를 향한 그에게는 이미 파란만장한 새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농공은행은 제1차 한일협약 (1904) 체결이후 실시된 고문정치 때 재정고문을 담당했던 일본의 目賀田 種太의 발의로 1906년 발족한 은행 이었다. 한성. 평양. 대구. 전주. 진주 .광주. 충주 .해주. 경성. 공주 함흥 등 11개 지역에 설립됐다. 그러나 설립취지인 "조선의 농업과 공업의 개량 발달을 위하여 대여한다"는 본 뜻과는 달리 그후 일제의 농간으로 그들의 식민지화 사업에 이용되었다. 그 한 예가 동척(東拓)의 거액 융자 였다

일본이 한국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1908년 설립한 특수국책회사 동 양척식주식회사는 1913년까지 4만7천 148정보의 토지를 강제 매수한데 이어 1914년에는 농공은행으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아 전라도, 황해도의 비옥한 옥토를 강제로 사들이는데 이용했었다. 소위 나주의 궁삼면 토지사건도 이 때 피해를 본 것이다. 이와같이 강점한 토지를 동척은 5할이 넘는고율의 소작 료를 받으며다시 한국의 영세농민들 에게 ‘소작을 주었었다.

이러한 착취로 이룩한 사세가 1917년에 들어서 본점을 서울에서 동경으 로 옮길 정도로 성장한 한편 만주.중국.필리핀.타이.브라질 등 세계 각 국에 52개의 계열사를 둘 만큼 성장해 나갔다.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착취한 자본으로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1906년 8월 6일 설립된 광주농공은행 도 이같은 배경에서 문을 열었다. 김성규.현기봉.박원계.최상진 등이 참여, 발족케 한데는 땅을 팔려는 영세농 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미곡상들의 횡포는 매우 심했다. 보릿고개를 이용, 미곡 수매금을 미리 방출한 뒤 가을에 헐값으로 마구 거둬들여 주벌 등 호남평야 농민들 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일본인 미곡상들의 횡포에 분노해 설립된 광주농공은행은 초창기 활약은 컸었다. 그러나 目賀田의 장난과 동 척의 횡포로 점차 농공은행은 제구실을 상실해 갔다. 당초 금융지원의 목적 은 거의 무시되고 상업대출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 실례로 설립 이듬해인 1907년 대출실적을 보면 대출 총액 2 백68만1천여원 가운데 농업자금은 20 만7천여원에 불과하고 공업자금 역시 10만7천여원인데 반해 상업대출금은 2 백22만5천여원에 달했다.(전국 농공은 행 통계) 대부분의 돈이 일인 상인들 대출금으로 이용됐었다. 한일합방 이 후엔 더욱 심했다. 1910년부터 1918년 6월까지 실시됐던 토지조사 사업은 그 대표적인 경제침략정책의 한 사례에 속한다. 당시 토지조사 사업은 한국의 재래 토지소유 관계를 근대적 소유제로 개편하려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본 내용은 조세착취 대상을 확보함과 아울러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 하고자 실시됐던 총독부의 저의가 뻔히 들여다 보이는 사업이었다. 8년이란 장구한 세월과 2천만원이란 거액의 돈을 투자한 이 정책은 그들 뜻대로 크게 성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인의 토지소유 의식은 당시만 해도 희박했었다. 이제까지 전근대적 사회에서 살아왔던 우리나라의 토지제도 는 원칙적으로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지배계급과 경작권의 소유자인 농민이다 같이 그 토지를 자기 소유로 생각 하고 있었다. 결국 토지 소유자에게 일 정기간에 지목을 신고토록 하는 토지조사 사업의 간계를 부린 결과 신 고절차를 몰라서도 많은 우리 농민이 농토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 시 소유주가 분명치 않은 토지 등을 합쳐 농경지 2만5천800정보가 총독부 로 몰수됐으며 산림도 1만9천400정보 에 달했다. 이같은 수치는 1918년 공식 발표된 내용이고 이후 1930년 작성된 통계에 의하면 전 국토의 40%에 해당 하는 8백88만 정보에 달했다.〈계속〉

[사진]무송은 결혼 2년만에 첫아들 영익(사진 왼쪽)을 낳아 환갑이 넘도록 손자를 못본 부친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일제 고문정치때 설립된 농공은행은 당시 재정고문을 담당했던 일본의 目賀田種太(사진 오른쪽)의 발의로 발족한 은행이었지만 그들의 식민지화 사업에 이용했다.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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