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골에 노을이 진다. 오렌지빛 서편 하늘 이 열리고 산 위에 노을이 짙게 드리운다. 해 질녘 경이로움에 짧은 하루동안의 무대에서 서둘러 퇴장을 서두르고 즐비했던 소품들을 정리한다.

시기, 미움,악, 사건사고가 난무한 이 세대 가 두렵고 한발 내딛기가 겁이 나는 시점에서 내고향 월출산 자락을 지치도록 보며 날마다 숨을 쉬고 살아감에 감사한다.

슬퍼도 슬픔을 먹어 버리고 기뻐도 활짝 웃 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농토만 바라보며 홀로 길을 가시는 아버지와 손톱이 길 사이 없는 노동에 까만 얼굴, 굵어지신 손마디에 호미 자국을 가지고 계신 내 어머니가 계시기에 더 욱 고향을 떠날 수가 없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 목가적이고 토속적인 시골 마을이 좋았다. 깊은 밤 앞산에서 절규 하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내 벌거벗 은 유년을 보냈고 철없이 방황하던 사춘기를 보내고 감히 사랑을 알게 한 젊음도 키웠다.

어릴 적에 소꼴을 먹이러 가는 오빠의 옷자 락을 잡고 따라갔던 앞산에서 땅개비 잡고 메뚜기 잡으며 풀 위를 뛰어다니며 놀던 일. 이 름도 모르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야산에서 오빠는 바위에 이름을 새기며 친구 들과 어우러져 놀았고 가시내는 가시내들끼리 꽃을 모으며 노래를 부르고 시간을 보냈다.

산 옆에 조용히 흐르는 계곡물은 우리들의 휴식처였고 양손으로 한 움큼 물을 모아 입에 대면 가슴속까지 적셔주는 진한 정이 있었다.

고삐끄는 재잘거림이 집 앞에 가까울 때 집 집마다 굴뚝에선 밥짓는 냄새가 온 동네를 적 시고 그날 하루는 휴식에 들어갔다.

지금도 가끔씩 찾아보는 계곡에 호젓한 사 색의 공간을 마련하여 앉아 있으면 어린시절 동무들의 소리가 다시 살아 들려오고 그 자리 그 산비탈에서 아무 사심 없이 뛰어 다녀 보 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고향은 내 인생 행로의 나침반이 되어 주며 내 죽어 영혼이 불탈 때 내 안에 담고 가야 할 필수품이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아프지 않을 사랑의 결정체이다.

이런 고향에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자취를 남기고, 다시 고향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 아들들을 키우며, 나 오늘도 흙 냄새 풍기며 한가로운 고향 길을 걸어본다.

[사진]최인숙

군서면 동구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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