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송의 동경 유학생활은 후일 그에 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민족적 긍지를 갖고 매사를 처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때 교류했던 교우관계에서 비롯됐고 근대기업에 투신, 성공하게 된 식견을 얻은 것도 유학생활 때문이었다. 무송 이 일본유학을 갈 당시 한인 동경 유 학생수는 무려 300-400명에 달했다. 합 방전 수십명에 불과했던 유학생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개화물결을 타 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대부 분 지주급 자식들이 유학을 갔지만 古 下 와 같이 뜻을 세우고 유학간 학생 들도 더러 있었다. 이때 유학생 사회에 서는 출신도별 모임단체가 많았다. 합 방해엔 대한흥학회란 단체로 통합돼 있었으나 곧 해산돼 버리고 각기 모임 을 갖고 있었다. 전라도의 호남다화회, 경상도의 낙동친목회, 함경도의 철북 친목회,평안도의 패서친목회, 황해도 의 해서친목회,경기 · 충청도의 삼한 구락부, 강원도의 영우구락부 등 친목 단체가 있었다. 무송은 호남다화회를 통해 고향 소식도 듣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알았다.

유학생활 3년만에 귀국길

나이 50에 얻은 늦둥이 무송은 아버 지로부터 항상 풍족한 생활비를 보내 왔으나 호주머니는 언제나 텅빈 상태 였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넉넉치 못 해 무송과 인촌이 각종 모임의 비용을 대고 학비를 대신 내주었기 때문이었 다. 부모들이 사준 양복들도 꽤 있었으 나 무료숙박소처럼 돼 버린 무송의 하숙방에는 이같은 옷들이 배겨나질 못했다. 당시 인촌은 송진우,장덕수 등의 학비를 대고 있었고 무송은 김용 무(무안출신으로 미군정 당시 법무부 장관 역임) 등 유학생 몇 명의 학비를 대고 있었다. 돈을 너무 많이 가져다 쓴다고 현기봉은 나무라는 편지를 쓰 기도 했다. 이때 무송은 동경의 사정을 얘기하고 고국에 돌아가면 훌륭한 일 을 할 이들에게 도움을 줄 것을 요청 하는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후일 부친은 무송의 편지를 받아보고 광주 농공은행 설립에 함께 참가한 김성규 (초대 은행장), 최상진 (최태근씨 조부) 등에게 보이며 "그놈 보기완 달리 성 긴데가 있어"라고 기꺼워 했었다고 한다.

1914년 본과에 진학한 무송의 동경 생활은 약간 이력이 나 있었다. 25세의 건장한 청년이었지만 고힘에 대한 향 수가 밀려 들었다. 휘문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2년간 영암 학 계리 고향 집에서 농토를 관리하며 집 을 지키기도 했던 그는 학계리 풍광을 너무 좋아했다. 소박한 풍경과 마을 주 민들의 인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무송의 고함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 다. 부친 현기봉도 뒷산 은적산에 깃든 학이 너무 좋아 호를 학파備I技)라 할 정도로 역시 고향을 사랑했다. 고향 은 적산을 사랑하고 학계리 계곡따라 흐르는 내(川)를 좋아한 무송은 고향 농 토를 언젠가는 일구겠다는 막연한 생 각을 이때부터 갖기 시작했다.

목포로 출발하는 아천포 일대의 뱃 길을 막아 보려는 대야망의 꿈도 꾸었 다. 여름이 되면서 동경생활에 약간 싫 증을 느낀 무송은 1914년 7월 인촌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귀국을 했다. 무송은 방학중 귀국이었지만 인 촌은 와세다 대학 예과, 본과 6년을 수 료하고 아예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었다. 이때 古下도 고향 담잉에 먼저 돌아가 요양중이었다.

제2의 고향 목포

인생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고국에 서의 새 생활설계에 무송은 3년만의 귀국에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귀국 당시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 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비밀결사 대원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 계기가 돼 세계는 전쟁이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본도 이에 민감한 반응 을 보이고 있었다. 동양을 제패하려는 일본의 야망은 중국을 건드려 참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야망은 합방된 조선에서도 노골화 됐 다. 1914년 6월 10일 당시 일본 총독부 는 조선 각급 학교에 교련과목을 신설 해 군사교육을 강요하고 있었다. 호전 (好戰)의 싹은 여러 곳에서 움렀다. 7 월 28일 드디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 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은 발발됐다. 경성의 경무총감부 는 군사상황 보도를 일절 금지시켰다.

이때 그들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준비를 서 두르고 있었다. 8월 23일 대독(對獨) 선전포고는 이렇게 해서 터졌다. 이같 은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무송은 귀국 했다. 무송은 부산에서 배를 갈아타고 목포로 돌아왔다.

목포집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 결되면서 일어난 의병들의 난을 피해 영암서 1908년 옮겨온 집이었다. 부친 이 개화된 목포로 가게된 것은 일부 의병들 가운데 일제에 항거한다는 본 래 뜻과는 달리 지주들을 습격한 이들 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남에서 일찍 개항과 더불어 개화선풍이 인 목 포부(木商帝)로 옮긴 현진사는 여기에 서 민의장(현 시의회 의장)을 지내기 도 했다.〈계속〉

[사진]무송이 4살 때 친모 문씨 부인이 죽자 학파는 곽씨 부인을 맞아들여 무송을 키우도록 했다. 사진은 무송 의 계모 곽순향씨 의 회갑연 모습.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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