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대 대로 가산을 물려받은 몇몇 '동네 부자'를 빼놓고는 대부분이 일년 농사지어 이듬 해 가을까지 식량 대기가 부족하던 무렵 이다. 이러다 보니 어머니들은 채 겨울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고구마밥이며 무밥 심지어는 김치밥에 이르기까지 앙식을 늘려 먹기 위한 별의별 묘책을 다 짜내야 했고, 한참 때인 우리들은 그러한 어머니 들이 못내 원망스럽기만 했다.

군사혁명후 초등학교를 마친 직후 산 골짝을 벗어나 들이 넓다던 영암으로 이 사를 해야했던 우리 집은 영리마을에 이 삿짐을 풀자마자 먼 사돈뻘 되는 최영감 님의 소개로 우선 논 여덟마지기와 밭 일 곱마지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를 평수 로 계산하면 논이 천육백평쯤되는 것이고, 발이 칠백평쯤 되는 것이니 이것 가 지고 할머니를 포함한 여덟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란불가능한 일이었다. 더 욱이 이 가운데 다섯마지기의 논이 지금 도 눈에 삼삼한 '갈라산' 논빼미이다. 갈 라산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는 나의 과 문으로 지금까지도 알 수 없지만, 당시 연세 지극하신 노인네들에게 듣기로는 가운데 길쭉하게 놓여있는 조그마한 그 산이야말로 동네의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동네에서 제일 부자인 '새암갖집' 상노 인의 말씀으로는 우리가 이사간 동네가 풍수지리상으로 지네형국이라고 하며,마 주 보고 있는 저 건너 읍네쪽 산이 닭형 국이라는 것이다. 닭과 지네는 상극인 관 계로 닭이 지네를 보기만 하면 쪼아대기 때문에 동네가 평안할리 없는데 그 사이 에 갈라산이 놓여 있어 동네를 보호해 주기 때문에 동네가 평안하고 밥술이나 먹 은 부자들이 끊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들 가운데 있는 별로 크지도 않는 그 산에 울창한 소나무 들이 빼꼼히 자리잡고 있고, 그 중앙부분 에는 우리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 고 있는 낭산(郞山) 김준연 선생의 조상 묘가 우람하고 우리를 압도하며 위치하 고 있는 것이다. 대개 명당이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산지수명(山紫水明)한 곳에 위치하는 법인데, 그 묘지 발복으로 낭산 같은 거물 정치인이 배출되었다고 전해 지는 명당치고는 그다지 볼품이 있어 보 이지 않는 그러한 곳이다.

어떻든 우리는 그 갈라산 한 귀퉁이에 있는 논 다섯마지기를 비교적 싼값에 구 입할 수 있었으니,연유인즉 그 전해의 큰 수해때 냇가 방천이 유실되어 온통 모 래로 뒤덮어 경작이 불가능한 황폐된 곳 이었기 때문이다. 군사혁명의 열기 속에 재건운동이 한참인 때라 동네 청년들이 힘을 모아 무너진 방천은 복구가 되었으 나 논 위에 쌓여 있는 모래를 걷어내고 경작이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내는 일은 우리 식구에게 남겨진 일이었다. 이사 직 후라서 묵은 거름이라곤 전혀 없는 상황 에서 무(無)에 유(有)를 창조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궁측통이 라고 궁리 끝에 함께 구입한 일곱마지기밭이 채 개간되지 않는 황무지인 점에 착 안하여 어차피 개간하면서 그 흙과 띠풀 을 갈라산 모래 논에 보토(補土)하기로 작정하고 온 식구가 동원되어 대역사(大役事)를 진행하게 되었다. 추운 겨울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와 누이는 황토 속에 깊게 뿌리 박은 띠밭을 개간하고, 아버지와 나는 그것을 1킬로 가량되는 갈라산 논빼미까지 져나르기를 겨울내 계속하니,중국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라는 고사처럼 온통 모래로 뒤덮였던 닷 마지거 논빼미는 어느덧 황토색으로 변 해가기 시작하였고,일곱마지기 띠밭은 여느 밭처럼 그 속살을 드러내기에 이르 렀다. 모래발에 농사지을 수 없을 것이라 는 동네사람들의 부정적 시각을 극복하 고 그해 첫 농사를 다른 옥답 못지 않게 수확을 거두게 되었을 때 우리 가족들의 기쁨은 "이제 한해 밥 굶는 면은 했다"는 안도감 그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타이타닉호의 침몰 때 살기위해 발버둥쳤던 승객들이나, 가 까운 친척 하나 없이 낯설고 물설은 타관 땅에 이사가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의지 하 나로 불굴의 삽질을 해댔던 우리 가족의 처지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어찌보면 그토록 호화의 극치를 보였 던 타이타닉호를 타고 여행길에 올랐던 가진 자들에 비해 마치 관리들의 가럼주 구와 연이은 흉년을 피해 간도지방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조상들의 처지 와 다름없었던 우리가 훨씬 처절했다면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든 동네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그러면서 동시에 자유당 독재에 맞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기 개높은 정치인 낭산을 넣았다는 명당으 로서의 갈라산은 회갑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나의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 는 추억의 한 토막이 분명하다.

[사진]오수열 ■조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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