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무송은 1912년 1월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멀리 목포로부터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간 무송은 그곳에서 仁村 김성수와 古下 송진우를 만난다. 일본이란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만난 이들은 이미 6년전 전남 창평 영학숙에서 만난 오랜 지우(知友) 관계였다. 열일곱에 창평에 갈 기회가 있었던 무송은 마침 인촌의 장인되는 고정주씨(1863-1934)가 설립한 영학숙 얘기를 자연스레 듣게 됐고 호기심에 이곳을 찾는 자리에서 인촌과 고하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호남에서 신학문을 소개한 영학숙 설립자 고정주는 동아일보 고재욱 할아버지. 호남학회를 발기하는 등 호남에서는 선각자로 널리 손꼽히는 분이었다. 규장각 직각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창평에 내러온 뒤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창흥의숙(창평초등학교 전신)을 세우고 향리의 젊은이들을 모아 한문이외에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며 영어 · 산수 등을 가르치신 분이었다. 영학숙은 1906년 봄 2남 광준(고재욱 부친)과 사위 인촌을 위해 따로 창평읍에서 5리 떨어진 월동에 세운 학숙으로 이표라는 선생을 초청,문을 열게 했다. 이표는 당시 영어와 한학에도 능한 선생으로 김성수 · 김병로(전 대법원장) · 송진우 · 고광준 등이 그 밑에서 공부를 배우고 있었다. 이때 무송은 창평을 다니러 온 것을 계기로 영학숙에 들러 말만 듣던 영어와 산수를 배우느라 몇일 묵었다. 한문만 배운 그로서는 영어 등은 신기한 학문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영학숙 친구들에게 호감이 갔었다. 무송보다 두 살 아래 인 인촌은 나이는 적었지만 덕이 있어 보였고 학문이 깊었으며, 한 살 아래의 고하는 애국심에 불탄 우국의 정이 넘치는 소년이었다. 김병로는 또 말에 조리가 있었다. 무송에겐 영학숙에서의 생활이 매우 뜻깊은 기회였다. 당시 태인에서는 을사조약을 반대하며 제자 임병찬과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순창에서 체포돼 세상이 뒤숭숭한 때였다. 일주일간의 공부를 마치고 목포로 돌아가는 무송을 창평까지 바래다주는 길에서 인촌은 미래의 재회를 다짐했다. 그로부터 6년 후. 무송은 영학숙의 자극을 받아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인촌과 고하가 일본 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곧장 뒤 아 간 것이다. 이 동경 유학에는 부친 현기봉의 배려도 컸다. 그의 일본 유학생활은 많은 것을 깨우치게 했다. 부산에서 화물선을 타고 10시간을 걸려 도착한 시모노세끼의 풍경도 풍경이려니와 4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동경의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시모노세끼에서 동경으로 가는 동안 잘 정리된 논과 밭이며 울창한 산림,깨끗한 촌락들이 차창을 지나칠 때 느낀 감동도 대단했지만 그 보다 규모 있게 발전된 동경에서 받은 인상은 또 다른 것이었다. 1907년 휘문의숙을 다니느라 경성에서 생활할 때 본 서울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20년 앞선 개화(開化)의 차이를 무송은 비로서 일본 현지에서 실감했다.

일본이 쇄국정책의 문을 활짝열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시점은 1853년. 미국제독 페리가 내항함으로써 비롯 됐다. 미국과의 화친조약을 계기로 英· 佛·러시아·네덜란드 등과도 통상조약을 맺은 일본은 그후 급진적으로 발전한 셈이다. 특히 일본 근대화의 비조라 할 명치(明治)가 1868년(고종 5년) 덕천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고, 명치유신을 이룩하면서 더욱 불을 지폈다. 우리의 개화는 이보다 늦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근대화의 첫발을 내디렸다. 그러나 1875년 운양호사건이 근거가 돼 개국한 근대화의 길은 일본의 침략적 야욕아래 위협받은 위축된 것이었다.

고국을 떠나 올 때까지 보았던 의병들의 죽창과 환도, 그리고 짚신들과 동경의 높이 솟은 공장의 굴뚝, 빌딩가를 비교해 볼 때 무송은 자연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을 나설 때 아버지 현기봉이 주체의식을 갖고 행동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한 것이었는지를 비로서 알 것 같았다. 인촌, 고하 등과 하숙을 함께 한 무송은 이들로부터 틈틈히 일어를 배우고 3월 명치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생활 중에도 틈틈히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데 신경을 썼다. 같은 명치대학을 다니고 있던 고하를 따라 연설회도 다니곤 했다. 무송은 유학시절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조만식·현상윤·최두선·김병로·윤정하 · 박용희 · 김철 등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이때다. 그후 장덕수도 인촌을 통해 알았으며 귀국전엔 근촌 백관수와도 교우했다. 동경시절 교우한 친구중 김병로 · 윤정하(전 국회의원) 등은 그후 부친 현기봉이 해동물산주식회사를 창립할 때 취체역,감사역으로 참여해 협력하기도 했다. 또 무송이 호남최초의 민족은행을 설립할 때는 이 두사람이 좋은 협력자가 됐다. 나중엔 안창호 · 신익희 등과도 알고 지냈는데 모두들 독립운동에 참여한 지사들이라는 점에서 무송의 정신속에는 자연스럽게 민족정신을 일찍부터 자리잡게 했다.

호남은행을 운영하면서 한사람의 일본인 사원도 쓰지 않고 기피,결국 이로인해 동일은행과의 합병이란 비극적 종말로 끝나도록까지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매사를 처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교우들로부터 온 영향이 컸다.

<사진1,2>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를 처음 만났던 창평 영학숙. 당시 신학문의 요람이었던 영학숙은 인촌의 장인되는 고정주씨 (원내 사진)가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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