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부호로서 민족은행을 설립, 민족자본을 육성한 무송(撫松) 현준호(玄俊鎬)는 1889년 9월 21일(음 8월 27일)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에서 태어났다. 星山 玄씨 26대손으로 아버지 현기봉(玄基奉)과 어머니 남평 문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형제는 2남5녀. 막내로 태어난 그는 형 龍鎬씨가 백부인 基東씨에게 양자로 입양되면서 아버지 基奉씨의 가계를 이어받는다. 형이 양자를 가는 바람에 외아들이 된 무송은 애지중지 자랐으나 그의 나이 4살 때 어머니 남평문씨가 죽게 되면서 그 후로부터 郭씨 (곽순향) 부인 손에 자랐다. 아버지 기봉의 무송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으며 무송 또한 부친을 대하는 정성이 깎듯했다. 어렸을 땐 부친으로부터서 한학을 깨우치고 신학문에 대한 관심도 부친으로부터 일깨웠다.

학파(鶴坡) 현기봉은 영암을 바탕으로 한 대지주로 한학을 수학, 진사 벼슬까지 한 호남 유림에서도 손꼽히는 학식 높은 인사였다. 그러나 개화와 함께 밀려드는 세태를 남보다 먼저 긍정적 입장에서 받아들여 20대에는 벌써 월출산 기슭에 자리잡은 구림학교 교장직을 맡아 지방 청소년·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또 1906년 8월 광주농공은행 창립에도 참여, 일본인들에게 헐값으로 쌀을 방매하는 호남 농민들을 보호한 민족심이 강한 분이기도 했다. 따라서 무송이 일본 유학을 원했을땐 쾌히 청을 들어주었다. 집념이 강한 무송에게서 현기봉은 무언가 보람된 앞날의 활기찬 활동을 벌써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경상북도 성주 성산 현씨인 현준호 일가는 증조부때 천안 살림을 이끌고 고향인 영암으로 이주해 왔었다. 이조말의 혼란한 세상을 피해 당시 충청,경기지방 사람들 중에는 호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현씨 일가도 이틈에 끼여 함께 영암으로 내려온 사람들 중의 한가족이었다. 시끄러운 세속의 풍진을 피해 현씨 일가의 번영한 터전을 이룩하기 위해 낯선 호남땅으로의 이주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 이주민 속에 낀 현씨 일가는 영암 학계리에 터를 잡은 뒤 근면한 가풍아래 곧 부흥을 이룩했다. 특히 학파 현기봉의 노력은 놀라웠다. 옛 현씨 가문의 모습을 완전히 이룩한 장본인이었다. 활동가인 현기봉은 목포로 이주해서도 많은 활약을 남겼다. 이때 무송의 나이 9살이었다. 부친을 따라 목포로 온 무송에게는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1914년의 목포는 활기찬 도시였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래 쇄국의 문을 열고 개국한 조선은 그해부터 개항을 서둘러 부산의 개항을 시초로 근대화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0년에는 원산이 개항됐고 이어 인천 (1883년), 군산(1889년)이 문을 열고 뒤를 이어 목포가 진남포와 함께 1897년 굳건하던 왕조의 빗장이 풀렸다. 이러한 개화물결을 따라 태평양의 열풍이 목포를 비롯 개항지를 휘몰아쳤다.

신유(辛酉 · 1801년), 기해사옥( 己亥邪獄· 1839년)때 보았던 기레스탄 (크리스찬)이라는 야소교(예수교), 신부모습을 한 양코배기들이 개항지를 자유스럽게 활보해 들어왔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정부는 일본과의 수교에 이어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는 한편 영국, 독일, 러시아,이태리,불란서 등과도 통상관계 조약을 체결했다. 개항지에는 지금까지 보지도 못한 새로운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금계랍(키니네)이라는 말라리아에 직효한 약과 석유, 성냥, 광목, 물감,양철 등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기한 물건들이 들어왔다. 목포는 개항과 함께 나날이 변모해 갔다. 따라서 9살에 부친을 따라 목포로 온 무송의 기억은 생생했다.

집은 남교동에 있었다. 무송의 본적이 목포로 되어 있는 것도 이때문이었다. 부친 현기봉은 이곳을 중심으로 광주농공은행 일에도 참가했으며 후에 해동물산주식회사 등 기업체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었다. 현기봉의 기업참여는 50세가 넘어서 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진사벼슬을 하면서 후진양성을 비롯,무송으로선 조부인 인묵(麟默)공이 남겨논 3천석 수확을 7천석으로 늘리는 등 가정부흥에만 힘을 쏟았다. 그러다 개화된 목포로 나간 것은 일부 의병들 가운데 일제에 항거한다는 본래의 뜻과는 달리 지주들을 습격한 일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남에서 일찍 개항과 더불어 개화선풍이 인 목포부(木浦府)로 옮긴 현진사는 여기에서 민의장(현재의 시의회의장격)을 지내기도 했다.〈계속〉

[사진]학파 현기봉씨(사진왼쪽)

[사진]무송의 부친으로 이조말 진사벼슬을 지낸 개화인물이다. 1906년 광주농공은행 설립에도 참가했다. 오른쪽 사진은 무송 현준호씨의 생전 모습.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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