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대 유·영암읍 교동리 출신·한국과학기술 한림원 종신회원·전북대학교 의대 명예교수

내가 기리는 고향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낭산(朗山) 김준연 선생님과 나의 초등학교 급장이던 이 아무개 친구 두 분이다. 낭산 선생은 영암읍 교동리 출신으로 일본 동경대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정치와 법률을 연구하셨다.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 한국민주당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국회의원, 법무부장관 등을 역임하였고 그 후 통일당 총재가 되었다. 1967년 민중 당 총재로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나는 이 지면에서 그의 정치철학과 정치이념을 말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기론 영암출신 중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한 사람이 틀림없는 낭산 선생님이 어떻게 동경 및 독일 유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남산 선생님의 영암 집은 월출산 기슭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였다. 내가 친구들과 월출산을 오를 땐 그 집을 지나치곤 했다. 내가 한번은 선친께 물었더니,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학혜택을 받아 공부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영암초등학교 다닐 때 급장이었던 이군은 정말 영리하고 건강하며 지도력이 뛰어났다. 공부도 참 잘 했었다. 인물이 잘 생겼고,말을 조리있게 할 줄 알았으며,글씨를 잘 썼다. 사물의 판단도 뛰어났다. 전말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구비한 인물이었다. 친구 이군의 집은 참빗을 소규모로 만들어 생활을 유지하는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군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군은 초등학교만을 졸업하고,가정형편상 더 이상 진학하지 못하고 평범한 직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그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상 지난 것 같다. 나는 이군을 생각 할 때마다 슬펐고 가슴이 아프다. 내가 그를 전혀 돕지 못한 무능함을 한탄하면서…. 만일 이군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면,우리나라 큰 인물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상당수의 장학재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기회에 훌륭한 고향의 인물을 양성 배출하기 위해서 영암장학재단 설립을 감히 제안한다. 고등학생·대학생·대학원생 그리고 박사 후 연구까지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장학재단 설립을. 외국에는 록펠러와 같은 큰 재단이 있지만, 우리고향 형편으로는 한 사람이 감당하는 재단설립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고향 사람들 각자 모두가 뜻을 모아 한사람 한사람의 출자로, 한 구좌에 소액(5천원 내지 일만원 정도)줄자하여 장학재단을 설립 할 것을 제안한다.

누가 주도해도 좋지만 필자는 '영암심문'이 주도해주길 바란다. 그리하여 미래를 열어갈 인재양성과 우리 고향자녀의 복지증진에 이바지 해 주길 바란다. 내 친구 이군과 같은 잠재적 인물이 겪을 쓰라린 경험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 기회를 빌어 이군의 명복을 빈다.

지난해 이태리에 갔을 때 받은 감명은 미켈란젤로 같은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것이고, 특히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날드 다 빈치, 군주론을 쓴 정치가 마키아벨리, 사실주의 예술가 보티첼리, 그리고 지동설을 주장한 갈리레이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모두 한 도시 필란체 출신임을 알고 부러웠다.

우리고함에도 월출산의 정기를 받아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각 분야에서 배출되길 바란다. 우리도 힘 모아 노력하면 가능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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