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옥이 어렵고 힘든 배움의 길에 들어선지 10년이 되던 해에 그 스승 김창조는 고향을 등지고 광주로 이사했다. 김창조는 광주에서 연주활동과 후진양성을 계속했다. 그때 김창조는 가이금 산조의 장별 설정을 완성하고 안기옥에 게 그 전수를 마친 후였다. 김창조 선생 은 다년간의 전수를 통해 안기옥의 뛰어난 재질을 알고 있었다. 1915년 어느 날 스승 김창조 선생은 안기옥을 무등사(無等寺)에 데리고 가서 그때까지 배운 가아금 산조를 연주하게 했다. 김창조 선생은 연주를 다 듣고 나서 매우 만족해 하면서 그 배운 것을 후세에 널리 알리라고 당부하였다. 이것이 김창조 선생에게서 배움을 결산한 날이었다. 이것 이 김창조 선생에게 배움을 결산한 날 이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김창조 가이금 산조가 바로 그때 전수 받은 것 이다.

김창조 선생은 이후에 전주로 거처를 옮겨 그 곳에서 회갑을 치루고 1919년에는 다시 광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병환으로 별세했다. 1915년 이후 안기옥은 김창조 선생을 떠난 3-4년동안 가이금 산조를 복습하면서 백낙준 선생을 찾아 거문고와 농악 음악을 배웠다. 그리고 1924년부터 1929년까지 약 5-6년간은 광주 부산 서울 함흥 청진 등지에서 권본을 꾸 려 후대 양성사업에 종사하였다.

1924년 이후 안기옥은 창극형식과 무용을 배합한 '항장무'를 작곡했고 조선 음악연구소(후에 조선성악연구소로 개칭)에 참가하여 조선 창극 발전에 공헌 했다. 당시 안기옥이 육성한 후진들은 진주에서만도 150명이 넘었고 청진(청진조 선악연구소)에서는 100여명의 연구생을 가르쳤다.

1930년경에 목포극장에 협률단이 조직되면서 안기옥은 예술지도를 맡았다. 이 단체는 가무 종목을 공연했는데 판소리·창민요·가야금 독주·가야금 병 창 · 무용 등이었고 가야금 독주는 안기 옥이 연주했다. 이 협률단은 전국 각지로 순회공연하며 민간 대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 당시 안기옥의 가야금 독주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처절하고 슬픈 정서로 된 느린 진양조는 청중들의 망국 생활의 울분을 자아냈다. 또 중모리에서는 울분이 터져 장내에서 흐느껴 우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휘모리를 연주할 때는 새로운 기분으로 연주기교를 찬탄하는 박수를 받았다고한다.

그러나 이 단체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 해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곧 해산되었고, 안기옥은 혼자서 시골에 다니면서 가야금 독주와 가야금 병창을 계속했다. 그는 이 시기에 김창조로부터 물려 받은 가야금 산조를 기초로 하여 새로이 발전시키는 일들을 하였다. 즉 김창조 가아금 산조 장단에 없었던 엇모리와 휘모리를 창작하고 그 밖에 몇 개 장절들을 새로이 창작했다. 이로 인해 가야금 산조의 장절이 풍부해졌고 연주기교에도 새로운 주법들이 개발되었다.

1936년말 안기옥은 함흥으로 이사하여 함흥과 청진에서 후대 양성사업을 했다. 그리고 1942년 일본의 도쿄< 나고야, 시모니 세키등에 가서 공연했다. 그떄 창는 이화중선,해금에는 유대복, 장고에는 한성준,가야금에는 안기옥이 공연단장 겸 맡았다. 도쿄에서 공연하는 기간에 도쿄방송국의 요청으로 가야금 산조를 한 성준 장고 반주로 레코드에 취입했다. 당시 도쿄 국립음악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들 안성현과 상봉했다.

이후로 조국에 들아온 안기옥은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예술 창조사업에 종사 했다. 1942년말 함흥으로부터 고향인 광주로 이사하여 가족 생계를 돌보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안기옥은 1946년 봄 서울로 이사하여 민족익단을 조직, 음악활동을 잠시 하다가 그해 6월에 평 양으로 이주하여 조선민족음악연구소장 으로 임명되어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 창극 부흥발전을 위해 '춘향전','흥부전' 정리사업을 했고 '박긴다리' 를 작곡했다.

1948년 협률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가야금을 가르치며 후진을 양성했다. 이시기에 1법성포 뱃노래'를 창작했다. 이 노래는 민족성이 짙은 새로운 풍격의 노래로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애창되었다.

이후 안기옥은 북한에서 음악예술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51년 민족고전예술극장 총장으로 임명된 것을 비롯해서 1952년 공화국(북한) 공훈배우, 1956년 북한 1급 인민배우 및 북한 최고대의원, 국제 민족음악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국가훈장과 노력훈장을 수상했다.

1954년 5월 29일 안기옥은 평양시 모란 봉서구역 고노동에서 회갑잔치를 치렀다. 그 해에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작곡한 관현악곡 '조국산천'이 완성되어 연주되었다.〈계속〉

[사진]안기옥 (1894-1974)의 생전 모습

[사진]안기옥이 생활했던 나주시 남평읍 대교 리.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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