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마당배우(영암읍 장암리)에서 태어나 5살 때 학교 선생님이시던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갔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6년을 목포에서 컸다. 아버지가 신안군 안좌도 섬 학교로 발령받아 4학년부 터는 그곳 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3년을 섬에서 산샘이다. 중고등학교 6년은 광주에서 다녔고 대학부터 지금까지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기간으로 따지면 서울살이 37년이 가장 길다. 그 다음은 6년씩을 산 목포, 광주다. 그렇지만 누가 고향을 물으면 말할 것도 없이 영암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좀 우습지 않은가. 철들기 전 5년을 살았고 학생 시절엔 방학 때나 한 달쯤씩 머물렀을 뿐, 사회에 나와서는 명절이나 휴가 때 찾아보는 인연을 고향이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아주다니.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고향 개념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고향은 반드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만을 뜻하지 않는다. 조상들의 연고가 있는 땅이 고향이다. 그래서 실향민 2세들은 구경도 못 해본 북쪽 부모의 고향이 자기 고향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16대조가 조선조 초기 세조의 쿠데타 후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파주에서 이주해 5백년 넘게 대대로 영암서 살 나왔으니 영암사람 중에도 영암사람인 셈이다. 그렇다고 역사성만으로 연고지가 바로 고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성이 자기의 내면 정서와 교감할 때만 고향이라는 관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분명한 귀속감이 생겨난다. 고향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느끼는 뭉클한 감정, 아련한 향수를 가능하게 편안함과 애틋한 동경은 조상으로부터 자신에게까지 이어지는 연 면한 삶의 앙금이 마음의 밑바닥에서 떠오르는 것이다.

철이 들면서 필자는 고향 영암의 월출산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힘을 얻는 버릇이 생겨났다.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오다 남편을 지나면서부터 스치듯 보이기 시작해 영산포를 지나 신부 경계를 넘어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수려한 봉우리들. 그 봉우리가 시야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벅차 오르고 맥박이 빨라지는 느낌은 50줄을 훨씬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의 거울에 월출산이 솟아나면 없던 용기가 생겨난다.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는다. 왜 그럴까.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아마도 영암에 뿌리를 둔 많은 사람이 필자와 마찬가지로 월출산에 특별한 느낌이 있을 줄 안다. 월출산은 모든 영암인의 정신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고장 사람들이 누리기 어려운 행복이다.

월출산은 얼른 보아 평지 돌출의 험산 같다. 그러나 뜯어보면 소금강이라는 별칭이나 영암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너무도 신령스럽게 잘 생긴 산이다. 그 뿌리는 멀리 백두대간에 있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려 한반도를 이룬 산줄기가 태평양을 만나 물에 잠기기 전 마지막 용트림을 하는 형세다. 한반도의 지맥은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월출산에서 끝난다. 그리고 바다에 잠겼다가 한라산에서 부활해 마지막 폭발을 일으킨다. 높이는 8백여 미터로 비교적 낮지만 아닌 내륙에 있었다면 해발 1천m급이 넘었을 표고다. 무엇보다 월출산의 매력은 보는 각도와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느끼을 주는 변화의 신비로움에 있다.

오래전부터 필자는 월출산이 영암사람들에게 큰바위 얼굴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큰 바위 얼굴을 보고 자란 영암인들이 왕인박사 비롯해 역사상의 인물로 내로라하는 전통을 이루어 온 것은 아닐지. 인걸이 지령이라고 한다면 월출산이 신비롭고 걸출한 기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영암인들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용암으로 끓고 있을지 모른다.

월출산이 있어 영암과 영암인은 영원하다.

문병호영암읍 장암리 출생중앙일보 사회부장 부국장중앙일보 편집국장대리미국 LUCA 객원연구원중앙일보 J&P 대표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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