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김국조

공의 휘호는 극조(弟), 자는 추원(追 遠)으로 참의공 김시종의 3남이다. 중종 29년 갑오(서기 賊 4년) 5월 15일 영암의 구음평리(지금의 못 해)에서 태어났다.

명종 19년 31세 때 종형 부사고 김국희와 더불어 무과에 올려 처음에 권관(權官)이 되었고 다음 해 만호(萬護)에 제수 되었다가 선조 20년(1587) 광양 현감이 되었으나 무자년에 파직했다. 공은 경인년에 다시 이성 현감을 제수받고 부임하였는데 이때 정여립이 역모로 죽임을 당하고 이 승지 이발의 형제가 이에 연루되어 옥사한 후였다. 이로 인해 공은 이 빈집과 인척의 의(義)가 있다 하여 후임 현감인 한덕수가 이를 인용해 모함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이 영달할 수 있는 계기를 삼으려고 전도사 정설과 채지목,박장, 백신, 서상덕, 환한, 이득춘, 이경운 등과 함께 불측 한 말로 사실을 날로 공이 이 공을 은밀히 도왔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이성으로부터 의금부로 나아가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 무고로 형을 받아 채지목 등 7명은 죽임을 당하고 한덕수와 정설 등은 사형만을 면하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공은 미처 출옥치 못하고 세상을 떴다. 이때가 공의 나이 58세 (1591년)였다. 공이 거주한 곳으로부터 서북쪽으로 20리 남짓한 거리에 있는 주용진 위 간 좌곤향의 기슭에 반 장하였고 그 후 3대에 걸쳐 은혜를 베풀어 공에게 순풍보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 의금부 사오 위도 총무 도총관 학천 군을 증(腫)였다.

공은 신장이 9척에 눈썹이 넓고 이마가 컸으며 여력이 뛰어나 활을 잡아 당기는 힘이 300근이나 되는 물체를 들어 올리는 힘과 맞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은 묘부인 임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긴 효자였다.

공의 오취는 영암 장씨 휘명소의 여식인데 일찍 돌아가 후취를 얻었다. 후취는 천안 전씨 휘 방필의 여식으로 공보다 18년 뒤에 졸(卒)하였다. 전 부인이 2님 2녀를 넣었는데 2남은 모두 요절하였고 장녀와 차녀는 선비 출신의 김준선과 김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그리고 후부인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왕(完)으로 진무 공신 학 성군의 봉(封)을 받고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차남 우(字)는 무과 경흥부사를 지냈다. 3남과 4남은 관(憲)과 선(宣)이며 여(女)는 무과 천추인 서희 효에게 불가하였다.

장자 김어수

학성 군 기완 장군의 장자로 공의 휘는 여수(苦水)요, 자는 수재(水裁)다. 공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일찍이 양 무공이 방어사로써 군사를 인솔하고 의주에 주둔해 있을 때 노병(慶兵)이 자주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경계가 자못 삼엄했는데 하루는 정탐하러 갔던 사람이 돌아와 말하기를 노병이 이르러 온다 했다. 이에 순변사로 있던 정신의 명령이 급히 양 무공을 재촉하여 성안으로 들어와 성을 방어토록 했다. 그런데 이때 양 무공이 마침 술에 취해 있어 공이 이에 양 무공의 말이라 하면서 이르기를 심의에 군사를 움직이면 중인들의 마음이 동요될까 두려우니 차라리 밝은 내일 입성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던바 명령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이에 공은 다음날 새벽에 이르러 비로소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양 무공에 고하니 양 무공이 놀래어 이르기를 내 하마터면 소인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고 한바 이 말은 명령이 평소 공의 위명(委命)을 시기하여 살해코자 했기 때문에 한 말이었던 것이다. 양 무공이 입성한 후 여러 장수들이 기와 북을 베풀고 적과 임전의 태세를 갖추려 함에 공이 이때 백의의 신분으로 나아가 이르기를 저들이 비록 오랑캐들이라 할지라도 군사에 대하여 배운 바가 있을 것이므로 교전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통고를 하게 될 것이며 설혹 은밀히 기습한다 할지라도 우리 쪽에서 대비만 하고 있으면 넉넉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노병의 출현을 보지도 않고 문득 이처럼 군사를 동원했다가 만일 저들이 싸움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고했다. 이윽고 과연 두 사람의 노병이 성래로 다가와 이르기를 우리가 장차 서평에서 사냥하려 하는데 귀국 측에서 혹시 경동할까 염려하여 사전에 통보한다 했다. 모두 이때 겨우 약관의 나이로써 이처럼 일을 미리 전망하고 현명하게 처리한 공의 식견에 감탄해 하고 장수가 될 만한 재기를 구하였다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공은 갑자년 무과 양장에 장원 급제하여 위 영구 주부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천 배 되었고, 사헌부 감찰로써 황 주판 관이 되어 부임하였다가 얼마 후 체임되었다.

정묘년 조정에서 장사들을 보내어 변경에 주둔시킬 때 공은 안주에 있게 되었는데 이때 번적인 강흥립이 군사를 인솔하고 침입하여 공은 병사 남기홍과 함께 적을 맞아 역전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 하여 남동이 성루로 올라가 분신자살을 기도하자 공도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 남공과 함께 순절하려 했다. 그러자 남동이 저지하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비록 나이가 젊으니 후일 마땅히 국가를 위해 등용할 날이 있을것 인즉 한 낫 죽기만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형조죄랑으로써 해남 현감을 역임하고 향리에서 지내던 중 병자년에 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감영으로 들어가 이때 중도에서 약세의 군사를 인솔하고 전진하지 못하고 있던 본도 관찰사 이 시방을 권하여 속히 군부의 위급을 구하도록 했다. 이때 공의 실굴에 의로운 빛이 역력히 나타남을 본 이 공이 마음속으로 공의 어짊을 헤아리고 그의 형인 안양공이 공을 크게 기특히 여겼었다.

공이 또 경흥부사가 되었을 때 노인들이 자주 국경을 침략하여 조정에서 이를 근심함에 방백에 고하여 이르기를 저들이 본시 사나운 종족이다. 우리 쪽에서 약점을 보여 오늘의 사태에 이른 것이므로 특별한 계책으로 제재하지 않으면 마침내 그들을 진압하지 못할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침략하게 된 것은 생활이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이 어렵게 된 것은 농사에 게 으르기 때문이다. 저들이 생활을 잃게 된 것은 또한 농사에 근면치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우리나라 수령들이 저들을 관섭(官攝)하여 가르치게 한다면 이외 같은 근심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 들은 반드시 우리의 말에 따르게 될 것이다. 이런 연후에 우리가 저들의 명을 빙자하여 우리의 영을 행한다면 변경의 근심을 가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방백이 이를 조정에 청하여 저들 나라에 고하였던바 과연 우리의 계책에 따르는지라 이에 공이 노인들에게 농사를 권장하여 근면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나태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시행하는 정책을 펴니 노인들이 한편으로 두려워하고 한편으로 은혜에 감복하여 이로부터 변경이 평온하게 되었다.

북동의 병사가 공석이 됨에 안양공이 조정에 말하여 이르기를 김모(某)가 오래도록 변방에 있어 은혜와 신의가 이미 백성들에게 깊이 스며들었으니 북변을 방어하는 데는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고 하여 드디어 함경북도 병사에 배(拜)하였다. 공은 부임한 뒤 군제가 해이함을 근심하여 많은 개혁을 하고 열어 가 지 적절한 조치들을 하였다. 병술년에 가선대부로 승자 되고 해성 군에 수프 봉 되었으며 도총부 부총관으로서 제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공은 포도대장을 지내고 관무재에 장원하여 가의 대부 노승자 되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신하된 사람의 도리는 마땅히 직분에 따라 소임을 다하다가 근력이 쇠약해지면 물러날 따름이라 하였던 공은 마침내 늙음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와 약 5년간 한가히 지내다 졸(辛)하니 향년 71세,경술년 4월이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현종이 애도하고 계관을 보내어 치지 하였고 10년 후 다시 호조판서에 정(隱)하였다.

장손 김세기

공의 휘는 세기이고 자는 신용이다. 비는 정부인 이천서씨로 첨지 중추중 형조 참판휘 희충의 따님이다.

조부 학성 군 김완장군의 총애를 받으며 자란 그는 약관 21세에 신묘 무과에 올렸다. 이후 선전 관에 임명된 공은 어느 날 왕이 친히 군사들의 조련을 시행 하는 자리에서 한 군장이 군율을 어기는 것을 보고 즉시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공이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반색기 (방향을 표시하는 깃발)로써 휘두르면 번거롭게 명을 전하지 아니하여도 군장 이 쓰고 이르러 올 것입니다 라고 하였었던 바 좌우가 모두 젊은 나이에 기지가 민첩함을 칭찬하였고 왕도 또한 크게 감탄하여 육품으로 벼슬의 품계를 올렸다. 도총부 도사 겸 내 승을 역임한 그는 거제 현령에 제수되었다가 훈련원 참정 을로 천배 되었다. 이후 위원과 산 군수에 제수됐으며 경주 영장과 창성 부사 그리고 곽산군수를 거쳐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었다. 다시 가선대부로 승급하여 학림군에 습봉되고 특별히 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이후에도 가의 대부로 승진, 함경남도 병사를 지냈다. 그는 55세에 질병으로 졸(卒)했다. 〈계속〉

[사진1] 장군 영당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159~3번지에 소재한 김완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우로 지난 1981년 10월 20일 전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9 호로 지정되었다.

초청 은공이 서거한 1635년이었고 18秘년에 보수 한 데 이어 1979년 전면 복원 정화했으며 1983년 중수하였다.

[사진2]부조며 부조지전(不調之典)이라고도 하는 부 조묘는 나라에 지대 한 공을 세운 문무형관에 사후에 어명으로 내리는 특전이다.

1635년 서거한 김완장 군은 인조대왕이 부조 묘를 명하였고 1979년 전면 복원 장화했으며 1983년 중수했다.

장군의 영당과 함께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159-3번지에 소재하며 전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문배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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