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향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차를 남평-세지-금정으로 이어지는 한가한 도로를 따라 몰면서 가을의 정취를 한껏 즐겼습니다. 금정면 소 재지를 지나 영암읍으로 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꺾어 고갯길로 오르는 도로를 탔습니다. 빨간 감으로 온통 마을을 붉게 물들인 한 동네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탐스런 감이 주렁주렁 달린 한 농가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농촌마을을 지나올 때마다 빨간 감나무에서 받았던 가을의 유혹에 마을 전체를 감으로 물들여 버린 산동네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낯선 방문객에 집주인은 의아한 표정 이었습니다. 고향이 영암이라는 얘기와 차를 몰다가 빨간 감나무가 너무나 아름다워 차를 세웠다는 얘기에 집주인은 그때서야 안심이라도 한 듯 걸레로 마루를 홈치며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마루에 걸터앉아 농촌의 가을 정취를 마음껏 즐기며 농촌 생활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대화에서 올 가을은 예년에 없던 풍년농사를 이루고서도 농민들의 가슴은 어느 해 보다도 더 심한 농산물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쌀 농사뿐만 아니라 과일이나 참깨 고추 등 모든 농사가 다 잘된 올 같은 풍년 농산물 값이 생산비도 못 건지는 그러한 가격대로 떨어져 농민들의 아픔 이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풍년이 들면 농산물 값이 떨어지는 것은 이해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해 못하는 것은 도시의 소비자들이 사먹는 가격이 산지 가격의 몇 배에 달한다는 사실입니다. ‘소비자들이 사는 가격의 절반만 농민들 손에 들어와도 억울한 생각이덜 들겠다’ 는 것입니다. "1년 내내 땀흘려 농사 지어봤자 중간 유통상인들의 배만 불려주는 현실에서 어느 누가 농 사를 짓겠느냐?"는 주장에 공감이 갔습니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쯤은 농민들도 쉽게 이해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본적 원리에도 불구하고 농축산물 가격만은 수요와 공급의 기본 원리에 관계없이 형성되고 있는 현실에 농민들은 분해합니다. 채소나 과일류가 풍작이 들거나 생산량이 조금만 초과해도 산지의 농민들은 영농비는 물론 수확에 따른 인건비조차 건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도시 소비자들이 농축산물을 싸게 사먹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산지 가격보다 작게는 두 세배에서 많게는 열 배에 이르는 소비자 값에 농민들은 분통을 터뜨립니다.

지난날의 어느 정권이 출범 초기에 큰 맘 먹고 이러한 농축산물 유통과정의 모순을 타개하고자 과감하게 덤벼든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런 개선책도 내놓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농축산물 유통구조 개혁에 기를 쓰고 덤벼드는 농산물 시장 토호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국민의 정부 또한 유통구조개혁에 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있지만 결과는 아직 ‘미지근’합니다. 산지에서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농축산물의 유통과정에 붙어 다니는 비용의 이름은 ‘상장 수수료, 중도매 인 비용, 하역비, 운송비, 포장비, 기타 운용비’ 등입니다. 산지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소비자 가격은 꼼짝하지 않는 잘못된 농축산물 가격 구조가 우리 농촌의 황폐화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사진]박 희 서

·학산·매월리 출신

·한국일보 기자

·무등일보.발행인 · 사장

·광주시 공동모금회 부회장(현)

박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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