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홍 근 / 영암읍 교동리 출생 / 전 초등 국어교과서 필심의위원 / 서울 월정초등학교 교장 / 현 한국초등학교 골프연맹 이사 및 심판위원
최 홍 근 / 영암읍 교동리 출생 / 전 초등 국어교과서 필심의위원 / 서울 월정초등학교 교장 / 현 한국초등학교 골프연맹 이사 및 심판위원

새해 아침이면 철들고 나서 난 두 가지 일을 하곤 한다. 그 첫째는 새 달력에 올 한 해 일어날 일들을 정리해서 기록하는 일이다. 제사, 결혼기념일, 집사람, 아들들과 며느리들, 손주들의 생일, 아파트 골프 동호회와 퇴직 교장단, 연맹임원 골프 라운드 날짜, 그리고 골프연맹의 학생골프대회 일정들을 기록하는 일이다. 깨끗한 새 달력에 빨강 동그라미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으면 어느새 내 일 년의 삶이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 다이나믹하게 펼쳐져 보여 좋다. 

두 번째로는 심심풀이로 토정비결을 본다. 그런데 올 한 해 토정비결은 여태껏 나타나지 않던 욕심내지 말고 화내지 말라는 수가 유독 많다. 원래 성격상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내 처지와 형편을 살펴 자족하며 살아온 나지만, 한 번 화가 나면 유독 화를 참아내지 못하였기에 새해부터 약간은 긴장이 된다. 

정년퇴직하기 전 해 여름이었나 보다. 이때는 내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투서를 하였는데 감사원 특별수사국에서 계좌추적과 수사를 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때문이었다. 72학급 교직원 수 160여 명, 5년 6개월 교장 근무 중 워낙 큰 학교여서 매사 조심하면서 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청천벽력이었다. 물론 분노는 몸뚱이를 태워버릴 듯 컸다. 이때 우연히 논어의 옹야편(雍也編) 공자와 애공(哀公)의 대화를 읽었다.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 중에서 누가 제일 학문을 좋아합니까?” “안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진실로 학문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렇게 안회를 사랑하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는 화난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화풀이를 하지 않고, 또한 과실(過失)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不貳過). 이 두 가지 점을 보아 안회는 참으로 참는 것에 대하여 수양을 다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동안의 내가 살아온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만 여유를 가졌더라면 충분히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을 일을 화를 내며 망가뜨린 일들이. 평상시의 난 인정 많고, 배려심이 깊은 상사이자 남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로 인해 두려운 상사, 엄한 아버지이자 남편이라는 오명도 달고 살았다. 후회가 막심했다. 그리고 이 엄혹한 사태도 마음을 다잡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년을 한 달 남겨놓은 어느 날, 문득 화를 남에게 옮기지 말고 감정 조절을 하라는 경구가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회처럼 화를 삭이며 남에게 옮기지 않고, 모든 것을 속으로 삭이며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집사람이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집사람도 안회보다 더 화를 삭이고 분노를 남에게 옮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도 많이 한 사람, 아들을 셋씩이나 낳아 그럴듯하게 키워낸 사람, 명예퇴직을 했다지만 39년여 공직 생활도 훌륭하게 마무리한 사람. 정말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이제까지 저지른 만행(?)을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다행히 투서 사건도 ‘혐의없음’으로 끝나고 해서 여유가 생겼다. 결국 찾아 낸 것은 집사람을 돕는 노후생활, 요리 학원을 찾았다. 두루두루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며칠 하다 말겠지 비아냥 거렸지만 부엌살림을 시작하길 8년여 이젠 완벽한 쉐프가 되었고, 하루하루 그동안 빚진 걸 갚고 있다. 

내가 180도 변해서 행복하다며 놀리는 집사람이 묻는다. “우리들의 삼시 세끼. 여보, 오늘 점심 뭘 먹지요?” 스파게티, 짜장면, 탕수육, 계란 볶음밥, 따끈한 수프에 토스트, 잔치국수, 들기름 메밀막국수, 녹차 보리굴비... 여러 가지 메뉴가 머릿속에 명멸하고, 어느새 냉장고를 뒤적이고, 길이 잘 든 웍을 꺼내 든다.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 공자의 제자 안회가 내 노후를 평안하게 만들었다. 역할을 바꾸고 나니 확실하게 집사람에게 쫒겨 날 일은 없으니 말이다. 더욱 요즈음 분노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정치인, 범법자들, 이혼하는 사람들의 뉴스가 인터넷 화면을 채우는 것을 볼 때면 내 판단이 참으로 훌륭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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