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근무하다 우연한 기회에 사업 시작
정직ㆍ근면ㆍ성실로 1천억대 버스회사 일궈
공익사업 사원 복지후생에 각별히 신경써

공기업 한국전력에 근무하다 30대 중반에 운수업계에 뛰어들어 서울버스조합 부이사장 9년과 제15대 전국버스연합회장을 역임하며 성공한 출향 기업인으로 황혼을 맞고 있는 조희량(87) 서울버스(주) 회장. 오랜 객지 생활에도 결코 고향을 잊어 본 적이 없다는 그는 집무실에 운원 (雲園) 신현조 화가로부터 특별 주문해 그린 월출산 그림을 가끔 쳐다보며 향수를 달래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버스 2대로 출발해 1천억 대의 자산가로 성공한 조희량 서울버스 회장을 만나 그동안 걸어온 삶의 여정을 들어 보았다.
<편집자 주>

 

▲먼저, 출향 기업인으로 성공하셨는데 회사를 소개해 주십시오.

1973년 서울버스(주)를 설립한 뒤 2001년 인천국제공항 리무진 버스 운행인가를 획득해 공항버스 운송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2014년 서울공항리무진(주)와 (주)서울글로벌광고(부동산임대업 및 광고업)를 설립했다. 

버스 보유대수는 서울버스 120대, 공항리무진버스 120대, 한국BRT 서울시외버스 100대 등 총 350여 대의 버스로 회사자산은 200억대, 그리고 빌딩 등 부동산 800억대를 합쳐 1천억 대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2년 전, 서울공항 리무진버스를 미래에셋에 처분하고 지금은 서울버스에 운전기사와 관리직 등 5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원래는 공기업에 근무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요?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전력에 입사했다. 재직 10년 될 무렵 부참사(사무관급) 시절인데, 중학교 선배인 버스회사 사장에게 은행보증을 서주었다가 선배가 돈을 갚지 못해 버스 2대의 지분을 받아 한국전력을 그만두고 버스회사에 몸을 담게 됐다. 당시 한국전력을 그만두고 버스회사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에게 상의를 했더니 사주를 보고 오셨는데 ‘路上各區 商業大吉’ 즉 ‘길 위에 각 구마다 상업을 하면 크게 길하다’는 말씀을 하시며 용기를 주셨다. 

모든 인생이 사주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 아버지께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봐준 사주가 그대로 일치되어 사업에 성공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팔순의 고령이신데 지금도 회사를 직접 경영하고 계신지?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지금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조준서·56)에게 경영권을 이양했다. 그러나 아직도 회사에 매일 출근해 경영 전반을 살피며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직원들의 후생복지에 남다른 신경을 쓰고 있다. 버스운송사업은 공익적인 사업으로 사원들에게 자녀들의 장학금은 물론 명절과 휴가 때 특별 보너스 등 사기진작을 위한 사원들의 충분한 후생복지로 노사 마찰 없이 회사경영을 잘 할 수 있었다.

80대의 나이에도 50대 이상의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년내내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녁식사 후 부인과 함께 한 시간 이상 걷기운동을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골프운동을 하고 음식은 가리지 않고 골고루 섭취하며 술은 한 잔도 하지 않는다. 

▲경영철학과 좌우명이 있다면?

정직과 근면·성실 그리고 과감한 투자와 사원복지에 최우선을 두고 회사를 경영했다. 특히 사원복지는 운전 기사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고 ‘시민들의 발’이라는 공익성을 갖게 해서 친절한 운행으로 서울버스가 매우 좋은 평판을 받았다. 또 기업경영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면 돈을 벌어 충분히 생활하며 살 수 있으나 뭉칫돈을 벌어서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의 운명이 별도로 타고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년 전, 서울공항 리무진버스를 처분할 때도 수익이 굉장히 좋은 알짜기업이어서 미래에셋이 욕심을 내 팔았는데 올해 코로나 때문에 거의 올스톱 상태에 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를 어떻게 짐작하고 알짜 기업을 처분했겠는가. 知足常樂(현실을 만족하면서 자기 분수에 맞게 잘 살면 항상 즐거움이 뒤따르게 마련이다)이 우리의 인생살이다.

▲고향을 언제 떠났으며, 유년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벌써 80대가 되어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어 오랜 서울 생활을 하다 보니 그리운 고향 영암 생각이 뇌리에 떠나질 않는다. 유년 시절과 꿈 많던 소년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중학 시절부터는 객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내 고향 영암은 예로부터 왕인박사와 도선국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각계각층에 훌륭한 인물을 수없이 배출하여 인물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영암에서 태어난 것을 나는 퍽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일생을 마치는 것을 커다란 행복으로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 말의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비록 일신상의 형편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고향을 마냥 그리면서 살고는 있지만 나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인 우리 고향 영암이 개발의 여파와 상관없이 마치 인자하신 어머님의 품안처럼 그 정겨운 옛 모습을 언제까지나 지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영암인들은 영암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고향 발전에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

▲그동안 살아오시면서 가장 값지고 보람된 일은?

15대 전국버스연합회장 시절 당시 교통부와 협력해 대학생 할인제도를 폐지한 것은 업계 내에서도 회자되는 부분이다. 성인과 구분이 어려웠던 대학생 할인을 폐지함으로써 업계 이익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서울버스는 설립 초기부터 타 운수회사와 궤를 달리했다.

독립형 회사로 주주도 없이, 지입 차주도 없이 회사를 운영했다. 이는 당시 주주들과의 분쟁으로 논란이 있었던 여타 회사들과 차별화된 전략이었다. 지입 차주가 없었던 점 또한 회사의 기반을 다지는데 한몫 했다. 이런 강점은 종사자들의 관리와 경영 효율성으로 이어졌다. 불필요한 분쟁의 소지를 없애고 버스경영에만 집중했기에 지금의 서울버스가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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