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K형은 거금을 UNICEF(유엔아동기금)에 쾌척했다. 광주 J초등학교에 같이 근무하던 30대 시절 내가 천주교로 인도한 형이다. 은퇴 후에는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고향 섬마을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람되게 보내고 있다. 섬마을을 돌아가며 독거노인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기도 한다니, 요즈음은 자기 부모도 늙으면 모시지 않고 요양원으로 보내는 판인데, 참 심성 고운 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고희가 넘은 나이에 벅찰 텐데도 500여 평이 넘는 밭에 마늘과 녹두를 재배해 어렵사리 생긴 수익금 전부를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기부했다는 미담에 가슴이 찡했다. 

김지원(루카·7)군은 2014년 12월 태어난 지, 100일을 맞아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 기부한 이후 지금까지도 나눔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가톨릭신문에서 읽었다. 의사가 꿈인 김군은 어렸을 때 아파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태어난 지 35일 만에 병원에 처음 입원한 김군은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당시 김군의 부모는 수많은 아이들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부터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꾸준히 기부를 하게 됐다고 한다. 아이는 다행히 2019년 수술하지 않고도 완치됐다. 부모는 김군 이름으로 처음에는 50만원, 이후에는 금액을 늘려 500만원, 1천만원, 2천만원 등 지난 6년 동안 20차례에 걸쳐 약 1억 원을 기부했다니... 전종복(욥·83)·김순분(논나·75) 노부부는 평생 모은 30억을 바보의나눔재단에 기부하여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기부금은 세 자녀를 둔 이 부부가 근검절약하여 월급 2만원을 받으면 1만8천원을 저금하고 2천원으로 살았다. 연탄이 비에 젖어도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할 정도로 아끼며 모아 이런 선행을 한 것이다. 이젠 흡족하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기부했다. 주님께 거저 받았으니, 다시 돌려드리는 마음이란다. 바보의나눔재단에 기부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늘나라에 가기 전, 마지막 남은 재산도 모두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니, 이 노부부야말로 천사들이 아닌가?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우리 가정은 어떻게 갚고 있을까?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물었다. 이야기를 듣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안방으로 들어가 경대 속에서 ‘두 손 모아 난민보호를’ UNHCR(유엔난민기구) 파란 링을 내 손목에 걸어 주었다. 이 기구는 난민, 실향민, 무국적자, 보호 대상자의 권리와 복지를 보장하고 있는 UN기구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백만 명의 난민을 돕고, 현재는 7천80만명의 대상자를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 단체에 수년 동안 매월 일정 금액을 기부하니 보내온 팔지라서 손목에 걸면 삶에서 늘 기부정신을 되새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빚에 시달리던 IMF 때도 적은 금액이지만 음성 꽃동네에 꾸준히 헌금하였고, 담양에서 42명의 독거노인들과 생활하고 있는 수녀원에도 수년동안 조그마한 성의를 표하고 있다. 40년 전, 조모님 초상 때에 조의금 일부는 고향 공소 건립기금 조성의 단초가 되었다. 한 형제는 공소 지을 땅도 기부했다. 신자 수도 적은 어려운 상황에서 십시일반 봉헌했고, 영암 본당 신자들의 전격적인 도움으로 완공을 보게 되었다. 당시 내 어머니가 공소회장으로 지내시며 우리 집에서 공소예절을 보았었다. L성당 J신부님이 신축하면서 생긴 헌 건축자재를 물려 주셨다. 미소 머금은 성모상을 공소에 모시도록 허락하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고향 공소를 지키는 성모님이 쓸쓸하다.

L성당에서는 사목회 분과장을 맡아 내 직장인 듯 기획했고, 레지오(성모님군단) 활동은 내가 할 수 있는 재능기부의 전부였다. 성당 건축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교우집을 방문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L성당에서 노력한 하느님의 보상은 컸다. 77평의 주택지 1% 당첨률이 통과됐다. 거기에서 10년을 살며 내 일처럼 성당 일에 열심했다. 그리고 그곳 Y성전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어렵고 땀 흘렸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이사 온 우미아파트 앞에 또, H성당을 신축해야 하는 곳이었다. 나에겐 버거웠지만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봉헌했다. 한편으로 기뻤다. ‘평생 동안 3번만 성전 건립에 봉헌하면 천당 문 앞에 갈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UNICEF에 기부하기로 결정하고 기부신청서를 작성하니 자동이체 통지가 문자로 날아온다. 3만원이면 어린이 29명에게 영양실조 치료식을 전달할 수 있다니 기쁘다. 또, 매월 공책 80권, 연필 290자루로 어린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이나 자료를 지원할 수도 있단다. 지난 약 70여년 동안 유니세프는 인종, 종교, 국적, 성별과 관계없이 전 세계 개발도상국에서 거리 아이들과 어린이 노동자, 난민 어린이 등 어려운 처지에 놓인 어린이를 위하여 영양, 보건, 식수공급 및 위생, 기초교육 분야에서 다양한 보호사업을 펼친다고 한다. 

몇 달 전, 아내는 청주 관할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미바회 회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단체에서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리는 곳이었다. 아내는 매월 기금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씨튼수녀회 가족이 되어 보내온 책자 ‘씨튼가족 75호’를 읽으며 신앙심을 기르고 있는 아내는 나에게 기부하는 마음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매스컴을 탈 정도의 거창한 기부는 못할망정, 농사일을 하는 도중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농사의 시조 신농씨에게 감사의 음식물을 조금 떼어 던지며 감사를 표하는 조상님의 풍습처럼, 가을철 붉은 홍시를 따면서 한두 개 까치밥으로 남기는 부모님의 지혜같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내 삶의 일부를 진심으로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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