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48> 한국 고대문화의 원형, 마한문화의 특질(上)

나주 복암리 고분군 영산강 지류에 형성된 하천평야의 낮은 구릉상에 4기가 분포된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 1호분의 경우 전실 앞 장례의식이 행해진 제사 공간이 있으며, 백제의 고분에서 전혀 발굴되지 않은 녹유탁잔(綠釉托盞)이 출토됐다. 탁잔에는 매의 의미를 지닌 '응준'이라는 명문이 발견돼 피장자 지위가 절대적인 존재였음을 짐작케 한다.

최근 유명한 철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광주 모 방송에 출연하여 ‘마한 문명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고, 마한 연구자들과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필자는 도올 선생이 어떠한 관점에서 마한사를 보려는가, 그리고 그의 시각이 철저한 실증 속에서 형성된 것인가를 방청석에서 살폈다. 그의 주장은 한국 고대사를 마한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해상무역이 마한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필자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객관적인 연구에 입각하여 내려진 결론이 아닌 동양 철학자의 직관에 입각하여 나온 것이기에 한계는 물론 있다. 필자는 늘 마한문화의 특질이 곧 한국 고대문화의 원형임을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다. 하지만 백제 중심 마한의 관점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필자의 주장이 자리 잡는 데는 시간이 걸리리라 믿는다. 이에 이미 주장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자 한다.

백제의 전통과 다른 다장 풍속

다시들 지역의 연맹 세력은 영산강 건너의 시종·반남 지역에 있었던 내비리국 등과 함께 마한 남부 연맹의 핵심 정치체로서 상호 경쟁과 협조를 통해 발전을 거듭하여 갔다. 진서 사이전 마한조의 "(마한인들은) 비록 싸우고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서로 먼저 굴복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마한 남부 연맹의 실상을 보여준다. 영산강식 토기나 옹관묘, 영산강식 석실을 공유하며 문화적 동질감을 확립하였다.

복암리 3호분의 96호 석실이 최대 9구, 5호 석실은 4구, 6호 석실은 2구 이상, 7호 석실은 2구의 시신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처럼 한 석실 안에 2인 이상이 안치된 것은 영산강 유역의 다장 풍속과 관련이 있다. 7호 석실 경우도 착용품인 환두대도 등을 볼 때, 피장자 모두 남성이라 생각되어 같은 시기 부부 합장묘의 전통이 나타나는 백제 고분의 특성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 6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백제의 전통과 무관함을 알려준다.

복암리 고분군에서 비교적 늦게 조영된 1호분의 조영 시기나 형식, 부장품 등에서 백제적 요소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백제의 지배를 받은 구체적 사례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복암리 1호분 석실의 구조 중에서 문틀식 현실문, 장방형에 가까운 현실 평면, 양벽의 조임 흔적, 긴 연도부 등과 같은 특징들은 대표적인 영산강식 고분 형태이다.
 
녹유탁잔이 출토된 복암리 1호분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신분은 복암리 3호분 5호, 16호 피장자들보다 위계가 높으나 7호 석실의 피장자와는 비슷한 위계로 여겨진다. 5호 석실에는 4명이 합장되었고, 16호 석실에는 소형화된 석실에도 불구하고 3명이 합장되었으나 7호 석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만 2명만이 석제 두침을 하고 직장되어 있다. 단독장을 하고 있는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신분이 다른 복암리 고분 피장자들보다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다. 복암리 1호분은 한반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실 앞에서 장례의식이 행해진 제사 공간이 있었다. 이곳에서 백제의 다른 고분들에서 전혀 발굴되지 않은 녹유탁잔(綠釉托盞)이 출토되었는데, 이 탁잔이 일부러 깨져 있는 것으로 볼 때 분구 조영을 마무리하면서 의식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지위가 인근 마한 남부 연맹 전체를 아우를 정도의 권력을 지닌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복암리 1호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탁잔의 바닥에 묵서로 '鷹○'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녹유탁잔이 있다.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이 탁잔은 백제 영역에서 출토된 사례가 아홉에 불과할 정도로 희소한 토기이다. 녹유는 당시 아직 중국의 청자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것으로, 현재 녹유 제작과 관련된 단서가 발견된 곳은 부여 쌍북리 요지와 동남리 요지뿐이다. 녹유 그릇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최상위층 등의 제한적 수요를 위하여 소량으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중한 녹유제품을 전세(傳世)하지 않고 부장품으로 사용한 사례는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경우가 유일하다. 전실 앞의 제사 행위에 직접 사용된 토기를 깨뜨려 함께 부장해버리는 행위 또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 사자(死者)의 배타적 소유를 염원하는 행위이다. 1호분의 피장자 지위가 절대적인 존재였음을 짐작케 한다.

독자적 연맹체를 유지했던 마한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탁잔의 바닥 외면에 2자(字)의 묵서 명문이 있다. 녹유의 박리가 심하여 분명하지는 않지만 위 글자는 '鷹'으로 추정되고, 아래 글자는 '人' 변이 확인되고 있다. '鷹'자를 기준으로 살필 때, 기왕에 백제의 별칭이라고 이해된 '응준'의 '鷹'자일 가능성이 높다. 응준(鷹準)은 '매'와 '새매' 즉, 매의 총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용맹한 사람'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한전에 "마한의 사람됨은 몹시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라는 기록이 있다. ‘진서’ 사이전에도 "(마한 사람들은) 성질은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고 하여 마한인의 용맹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역시 같은 사이전 기록에 "나라 안에 역사(役事)가 있으면, 나이가 젊고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등가죽을 큰 노끈으로 꿰어서 지팡이에 그 노끈을 매어 내두르게 하면서 종일토록 소리를 지르고 일을 하지만 조금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활과 방패와 창을 잘 쓸 줄 안다"고 되어 있다. 이는 마한 사람들의 용맹함을 중국인들이 인식하였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용맹스럽고 사납다’라는 부정적인 표현에서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마한인이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진서’ 사이전 마한 조에 "풍속은 기강이 적고, 꿇어앉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거나,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라고 하여 마한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 또한 마한이 중화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 연맹체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마한 남부 연맹과 대립을 하였던 백제를 통해 마한에 대한 소식을 주로 들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측 기록들은 마한의 강성함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매의 의미를 지닌 '응준'이 명문으로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응준'이라는 칭호가 복암리 1호분 피장자에게 붙여진 것은, 그가 마한 연맹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고려 후기에 서술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후왕(백제 성왕을 지칭함) 혹은 남부여라고 부르거나 혹은 응준으로 부르며 신라와 싸웠다(後王或號南扶餘 或稱鷹準與羅鬪)"라고 한 기록이 있다. 성왕 때 백제를 '남부여', 또는 '응준'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었다. 백제 왕실이 부여족을 계승하였음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475년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부여계 백제 왕실은, 494년 북부여가 고구려에 복속되자 그들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한 것이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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