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희 봉 학산면 계천길 문화유산해설사 전통건축해설사 영암군문화관광해설가

가끔은 버스를 타고 화소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길섶의 갈대가 손을 흔들어 바람을 맞이한다. 조수가 드나드는 바닷가나 강가의 넓고 평평하게 생긴 땅을 뻘, 개흙, 개펄, 펄, 갯벌, 간석지 등으로 부른다. 갈대는 갯벌과 아주 친하다. 갯벌은 조류로 운반되는 모래나 점토의 미세입자가 파도가 잔잔한 해역에 오랫동안 쌓여 생기는 평탄한 지형을 말한다. 예전 영암에도 넓은 갯벌이 있었고, 많은 종류의 각종 해산물과 물고기가 풍부했었다고 하면 연세가 지긋한 토박이들은 응~그랬지 하겠지만, 어린아이나 영암에 귀촌하거나 귀농한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현재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옛 지도를 보면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제방을 쌓아 만든 간척지는 군서면에 있는 지남뜰이다. 1550년경 나주 목사를 지낸 임구령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양장리와 동호리 사이 강폭이 좁아서 제방을 쌓아 농토를 만든 것이며, 두 번째는 서호면에 있는 학파농장이다. 1940년에 착공해 25년이 넘는 공사 끝에 생긴 간척지로 현준호 씨가 시작하여 아들인 현영원에 의해 완공되었다. 그리고 영산강 하굿둑이 1981년에 완공되면서 농지가 생겼으며 1993년에 영암호가 완공되면서 미암면과 삼호읍에 많은 농지가 생겼다. 해안에 따라 많은 둑을 만들면서 농지를 많이 얻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도 많다. 조선 시대에는 낙지, 숭어, 농어 등 영암의 수산물들이 임금님께 진상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고 한다. 영산강 하구의 풍부한 퇴적토와 영암 월출산의 맥반석에서 녹아내린 민물과 황토가 모여든 갯벌은 미세하고 부드러워서 많은 생물이 어우러져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금호 방조제가 생기기 전의 미암 문수포와 주변 포구에서는 낙지, 짱뚱어, 꼬막, 새우, 석화, 숭어가 많이 나왔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낙지는 임금님께 진상되었고 독천 낙지거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또한 갯지렁이의 품질이 좋아 일본에 수출도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일본의 한 지방에서 연안 갯벌이 황폐해져 짱뚱어가 사라지자 미암지역에서 나오는 짱뚱어를 이용하여 갯벌생태계 복원에 성공했다 한다. 가격을 두 세배 정도 많이 주고 사 갔다고 하니 미암지역의 짱뚱어가 한류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 후 2~3년 정도 재첩이 나오기도 했으나 물의 순환이 되지 않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서호면은 학파농장이 생기면서 많은 농지가 생겼으며, 서호강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지역으로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매향비와 선사유적지, 고인돌 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옛 선인들이 월출산과 서호강을 시상으로 하여 많은 시로 남긴 것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바위, 황새바위같이 새 이름 바위도 있고 선학리라는 마을 이름도 있다.

새는 생태계 지표종이다. 다양한 조류의 서식은 우리 생태계가 완전하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과다한 농약의 사용으로 벌레를 주식으로 하는 새들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빈약한 생태계는 환경을 변화시켜 결국 사람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종면은 영산강 하굿둑이 완성되면서 가장 많은 간척지가 생긴 곳이다. 간척지가 생기기 전에는 낙지, 숭어, 짱뚱어, 바지락, 맛조개, 대갱이 등 많은 해산물이 나왔으며 작은 고래인 상괭이도 시장에서 볼 수 있었다 한다. 영암 어란을 처음으로 만든 곳도 시종면이다. 어란은 산란 직전 통통하게 살이 오른 숭어에서 알을 꺼내 자연 바람에 건조한 것을 최고로 치는데 영산강 포구로 올라온 참숭어가 찰진 갯벌에서 미생물을 흠뻑 먹고 자라서인지 알이 크고 단 것으로 유명했다. 소금물에 담가 불순물을 빼고 간장에 담그고 건조하면서 모양을 잡고, 참기름를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20일 동안 해야 한다. 어란 장인도 있지만 각 가정에서 조금씩 집안 식구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기도 하였다 한다.

배가 출항하여 물고기를 잡아 오면, 물고기를 팔기도 하고 이웃과 나누어 먹는 우리의 정 문화도 같이 사라졌다. 아낙네들이 뻘배를 타고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사투리로 ‘갯바느질’이라 하는데 그 또한 사라져 버렸다. 삼포천과 덕진천이 만나는 영산강 삼각지에는 일본이 시종의 쌀을 실어 나르려고 멍수바위 위에 등대를 설치하였다. 등대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지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등대는 목포와 영산포를 항해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암군 주변에 둑이 생기고 호가 생기면서 마한문화와 영산강 문화도 많이 실종되었다. 예전 포구가 그대로 있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영암 서호강의 풍광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들을 시대에 맞게 다듬고, 군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영암의 풍광 사진도 기증받아, 전시를 통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홍보를 한다면 청소년들에게는 향토문화의 자양분이 될 것이고,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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