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항·이하곤 등 옛 기록 소상하게 기술
영암학연회, 모정마을서 역사문화 답사활동

영암문화원 영암학연회(회장 최문수)는 지난 9월 14일 군서 모정마을을 찾아 김창오 행복마을추진위원장의 마을의 유래와 설화, 문화재 등의 설명을 듣는 중 고서 기록에만 남아 있는 ‘쌍취정’의 복원에 대해 뜻을 함께 했다.

모정마을에는 원풍정·망월정이 있고 가장 오래된 쌍취정은 어떤 연유인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엄길마을에 거주하는 전씨네가 이를 구입해 자신의 마을로 이설하여 정자 본래의 모습을 바꾼 후 ‘수래정’이라 이름을 붙이고 사용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창오 모정행복마을추진위원장은 “마을 입향조인 선산임씨 임구령 목사의 후손들이 19세기 초에 모정저수지 주변의 논을 팔고 이주하면서 쌍취정까지 처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면서 “우연하게 2014년 임구령 목사의 16세손인 종손 임선우씨와의 만남을 가지면서 쌍취정의 위치를 확인했으며 그가 보관하고 있는 ‘쌍취정기’와 문곡 김수항이 쓴 중수기 원문의 복사본을 받아 500여 년 만에 정자에 대한 원문기록을 읽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쌍취정기’에는 임구령(1501~1562) 목사의 일대기와 함께 영암 서구림에서 정착해 진남포 일대에 제방을 쌓고 개간하는 한편 못(저수지)를 파고 연을 심어 아름답게 꾸미고 모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모정’(茅亭)이란 정자 이름은 요 임금의 ‘모자불치’(茅茨不侈:초막에 살며 사치하지 않는다)라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형제간의 동락을 담아 쌍취정(雙醉亭)으로 정자의 이름을 바꾸었다.(1614년 박동열 기술)

1678년에 쓰여진 쌍취정 중수기에 따르면 임구령 목사의 형인 석천 임억령(1496~1568) 선생이 담양부사에 부임한 뒤 쌍취정에 와서 시를 읊었는데 이후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로 소실되고 시가 새겨진 편액도 사라졌다. 이후 쌍취정을 중건했으나 시가 사라져 찾는 중 창평 어느 집에서 선생의 유고를 발견해 다시 편액에 시를 새겨 걸었다.(1678년 김수항 기록)

또한 조선 중기의 화가이자 평론가인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이 1722년 장인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가자 찾아가는 길에 호남지역을 유람하고 ‘남유록’(南游綠)이라는 기행문집을 남겼는데 여기에 쌍취정에 대한 묘사장면이 있다. “모정 송림(松林)이 9리 숲을 이루고 있다. 들으니 쌍취정 아래 큰 연못이 있어 여름철에는 연꽃이 무성하게 피고 위로 큰 둑을 쌓아 수양버들 만(萬) 그루가 있으며 아래에는 갑문이 설치되어 있어 남쪽 호수로 통하여 자연히 또 하나의 호심정(湖心亭)이라고 하는데 그 승경이 어찌 무림(절강성 항주시 서쪽-항주 이북의 별칭)에서 나왔겠는가”라며 주변 풍경을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쌍취정 기록은 모정마을 광산김씨 문중에서 보관하던 200년 전 집안의 삼효자와 김구해의 빈민구휼에 대한 조정이 보낸 포상 내용의 ‘감결(甘結:조선 시대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내리는 공문)에는 서면 모정리 쌍취정 밑에 있는 방축의 세금 거두는 일’에서 쌍취정의 이름과 위치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정자의 위치는 구 모정저수지 인근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모정저수지는 일제 강점기에 2배 이상 확장됐다.

예부터 문학가, 화가, 가무예술인 등이 즐겨 찾았고 영감을 주었던 쌍취정은 이젠 사라지고 없지만 모정마을 주민들은 동네의 자랑이었던 ‘쌍취정’이 다시 서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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