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보 농민항일운동 관련자 27명 늘어
매년 1~2명 ‘찔끔’…47명 유족들 불만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영암출신 독립유공자 고 최사진 씨의 배우자 박명순 씨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한 후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117세의 고령으로 휠체어에 앉은 박 여사가 앉은 자리까지 가서 허리를 숙여 훈장을 수여했다.

제75주년 광복절을 맞아 영암지역에서 영보 형제봉 항일농민운동 관련자 2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이로써 영보 형제봉에서 항일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 가운데 국가에서 인정받은 독립유공자는 모두 27명으로 늘었으나 아직까지 47명이 서훈을 받지 못해 유족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영암출신 고 최사진·최중열 씨 등 2명을 비롯 독립유공자 5명의 유족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고 최사진씨와 최중열씨는 1932년 6월 고향인 덕진면 영보리 형제봉에서 항일농민운동에 참여했다.

이날 고 최사진씨의 아내 박명순(117세)씨는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점을 고려해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자리로 내려가 표창을 수여했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영보 형제봉 항일농민운동 관련자는 2018년 11월 순국선열의 날 6명, 2019년 3.1절 1명과 광복절 2명, 그리고 올해 3.1절 1명, 광복절 2명 등 12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고 그 이전까지 합치면 모두 27명이 서훈 대상자에 포함됐다.

이는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포상 심사기준’을 개선하여 3개월 이상 수형 기준을 완화하고, 행적이 불분명하더라도 결격사유가 확인되지 않으면 포상키로 했다.

특히 사회주의 활동 참여자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으면 포상키로 한데 따른 것이다.
영보 형제봉 항일농민운동은 1932년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농민 독립항쟁 사건으로 150여명이 경찰에 체포 연행됐다. 이 가운데 74명은 재판에 회부돼 최고 5년에서 최하 벌금 20원까지 68명이 실형을 받았다. 이들은 일제 경찰에 극심한 고초와 옥고를 겪었지만 한국전쟁 때 사회주의 계열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서훈심사에 번번히 보류돼왔다 문재인 정부들어 12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보훈처는 2018년 6명을 시작으로 해마다 1~2명씩만 서훈 대상자로 선정하고 있어 나머지 47명은 똑같은 행적을 두고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최윤호 영암농민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은 “정부의 개선된 보훈 기준에도 아직까지 47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면서 “당시 판결문 외 더 이상 내세울 입증자료가 무엇이 있겠는가”고 불만을 드러냈다.

최 회장은 이어 “단일사건으로 10명 이상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일은 드문 일이다. 영암을 항일운동의 성지로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사업이 조속히 추진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영보 형제봉 항일농민운동은?

‘영암 형제봉 만세사건’으로 불렸던 영보 항일농민운동은 1932년 6월 4일 일어난 전국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으로 150여 명이 연행돼 조사받고 1년 후 74명이 재판에 회부된 사건이었다. 당시 일제 검·경이나 재판소가 소작쟁의, 불법시위 등으로 축소 처리했다.

처음 시작은 1930년 5월 최기동의 지도아래 곽명수·최헌원 등이 해방운동 영암중앙부를 결성했으나 최기동의 검거와 일제의 방해로 무산됐다. 1931년 10월 곽명수는 김판권·최판옥 등과 함께 합법적 농민조합을 조직하려 했으나 이 역시 좌절되자 비밀리에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1932년 4월 18일 덕진면 영보리 뒷산 형제봉에서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고 소작인들의 권익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6월 4일 영보정에서 영보리·노송리·장암리 등 주민 150여 명이 모여 노동절(메이데이) 기념회를 연 뒤 뒷산인 형제봉에서 산유회(山遊會)를 가졌다.

이어 일본인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고 시위행진에 나섰다.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 150여 명이 체포되고 74명이 기소돼 68명이 실형을 받았다. 당시 주동자는 5년에서 1년 징역형, 70원에서 20원의 벌금의 중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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