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7>태간리 자라봉 고분과 마한왕국 영암(下)

지난 7월 6일 ‘남도의병 역사공원’ 조성사업 대상지로 나주시가 1순위에 선정되었다. 나주시가 영상테마파크가 있는 공산면에 총사업비 450억원을 투입해 33만㎡(약 10만평) 부지에 박물관, 전시실, 테마파크, 상징조형물, 학예실, 교육관, 역사숲, 편의시설 등을 조성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나주는 누가 뭐라 해도 남도의병 역사공원이 들어설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임진 의병의 기치를 높이 올린 김천일과 나주 의병, 전기 의병으로부터 후기 의병에 이르는 한말의병 전쟁의 중심지가 나주였기 때문에 나주가 의병 역사공원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하여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주의병의 실체는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격 부여도 미흡한 실정이다. 예컨대, 의병 전쟁의 규모로 볼 때 비교되지 않는 규모인 제천의병의 독립유공자 서훈자와 나주의병 서훈자 숫자가 비슷하다. 이는 나주의병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찾으려는 그동안의 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의병 역사공원이 형해화된 기념관이 아닌 호남의 정체성을 이끌어내는 중심 도량이 되길 바라 마지않는다.

영암의병, 기억하는 장을 만들어야

필자가 이미 2019년 ‘영암의병사연구’라는 저서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냈지만, 영암의병은 나주의병과 더불어 한말 호남의병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그 유적을 복원하여 영암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영암의병의 역사적 위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영암군 차원에서 부부의병, 남매의병으로 유명한 양방매 여성의병의 생가 안내판을 세웠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범한 글귀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구림과 영암읍에서 빛나는 3·1운동이 일어났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그 사실이 누락된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마한연구소 설립이 시급하다

시종지역이 고대 마한왕국의 중심지임을 입증하는 유적·유물이 차고도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가 본란을 통해 수차례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조사하는 전문연구소가 적어도 영암군 차원에서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주학 조례를 만들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나주지역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자라봉 고분은 횡혈식 석실 고분이다

지난 호에 다룬 태간리 자라봉 고분은 전방후원형 고분의 축조과정 및 토목공법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첫 조사 때는 돌방의 형태, 유사흑도 등의 출토유물을 통해 4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2, 3차의 조사에서 확인된 출토유물과 앞트기식 돌방(횡혈식 석실)의 구조를 통해 볼 때 분구의 최초 축조는 5세기 중후반이며, 돌방의 축조와 최종분구 완성, 원통모양 토기가 세워진 시기는 5세기 후반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 축조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태간리 고분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전방후원형 고분 가운데 유일한 수혈식 석실묘(竪穴式 石室墓)로 파악되고 있다고 백과사전에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첫 조사 때 그렇게 파악하였지만, 2차 조사를 거치며 수혈식이 아닌 앞트기식 돌방으로 새롭게 추정하였다.
 
원형봉분 축조 후 방형봉분이 축조되었다

한편 태간리 고분은 먼저 뒤쪽의 원형 봉분이 축조된 다음 이에 덧붙여 앞쪽의 방형 봉분이 완성된 국내 최초의 사례이다. 원형 봉분과 방형 봉분이 동시에 조성된 광주 명화동 고분과 함평 신덕 고분 등과는 축조 양태가 다르다.

태간리 고분처럼 원형 봉분이 만들어진 다음 방형 봉분이 조성된 사례는 일본 아이치현 오오스후타고야마(大須二子山) 고분, 오사카부 쿠라츠카(蔵塚古墳) 고분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두 지역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

한편 3차례에 걸친 조사결과, 고분의 전반적인 축조공정도 밝혀졌다. 모두 6단계의 축조 공정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데, 1단계로 성토하기 전에 분구를 축조할 범위에 대한 정지 작업이 이루어졌다.

2단계는 1차 원형부 성토작업이 진행되는 단계로 분구 바깥쪽에 복발형(∩)의 두둑을 쌓은 뒤 내부를 성토하는 ‘제방형 성토’가 수직으로 2차례 이루어진 뒤 원형부 전체에 한 차례의 성토가 더 이루어졌다. 원형부 북쪽, 남쪽, 동쪽에서는 중앙에 점토 블록의 인위적인 성토재를 놓고 양쪽에 성토한 구획 성토가 확인된다.

3단계는 원형부 남쪽에 덧붙여 방형부 성토가 이루어지는 단계로 세 번에 걸쳐 성토를 진행하였다. 전체적으로 유사판촉의 성토방법이 나타나며 원형부에 비해 단순한 성토재가 사용되었다. 4단계는 방형부에 비해 높게 조영된 원형부의 분형을 가완성하는 단계로 약 1.5m 정도 더 성토하여 분구를 완성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북→남쪽으로 네 부분으로 나누어 분할 성토하였다. 5단계는 매장 주체부를 축조할 지점에 편오각형으로 묘광을 다시 굴착한 뒤 돌방을 축조하였다. 마지막 6단계는 시신 안치 후 천장돌을 덮고 다시 성토하여 최종 분구를 완성하였다.

요약하면, 원형 봉분은 가장자리를 따라 흙으로 단면이 ‘∩’ 모양인 둑을 쌓은 뒤 내부를 분할 구획하여 채워 나가는 식으로 조성되었는데, 봉분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경사지게 성토(盛土)하는 방법과 안쪽에서 바깥으로 경사지게 성토하는 방법이 번갈아 사용되었다. 반면 방형 봉분은 전체적으로 수평에 가깝게 성토되어 차이를 보였다.

또한 태간리 고분에서는 적지 않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들은 돌방과 분구, 도랑 등에서 출토되었는데, 피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귀걸이, 구슬, 큰칼, 쇠창, 쇠낫, 쇠도끼, 쇠손칼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원형부 동남쪽 분구 최상위 성토층에서 항아리 2개를 합구한 옹관이 발견되었다. 석실을 축조하여 시신을 안치한 후 봉분을 덮는 과정에서 옹관을 묻은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전방후원형 고분에서 이 같은 경우는 드물다.

출토유물을 통해 몇 가지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우선 원형부와 방형부가 만나는 지점에서는 아가리가 깨뜨려진 항아리 1점이 출토되었다. 아가리를 깨뜨려 봉분 입구에 버리는 것은 장례 행위를 마치면서 하는 의례 행위인데, 이러한 의식이 자라봉 고분에서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을 통해 마한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출토 부장품 가운데 소 또는 돼지로 추정되는 동물 뼈가 1점 나왔다는 점이다. 이 뼈의 상태를 좀 더 살펴야겠으나, 무덤 안에서 부장품으로 나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온전한 형태의 소뼈 유적에서 확인하였듯이 순장 대용으로 동물을 희생으로 삼았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마한은 소나 말을 수레 대신 장례에 사용하였다고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와 있다. 이를 자라봉 고분에서도 확인한 셈이다.

영산강 유역의 대부분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구슬이 90점이나 나왔다. 이 또한 마한인이 금·은 보다 구슬을 귀히 여겼다는 중국 측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피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큰 칼, 쇠창, 쇠손칼, 쇠화살촉, 꺽쇠, 쇠도끼, 쇠낫 등이 목관 안에서 나왔다. 동물을 순장으로 사용하고 철제 무기를 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고분 피장자는 상당한 정치 권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한 해명은 이 지역 마한왕국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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