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2>마한의 심장 시종과 진도(下)

‘마한 특별법’ 준비 철저히 해야

지난 호에 일명 ‘마한 특별법’ 제정과 관련된 글을 올렸다. 본지에 게재된 필자의 글을 보고 여기저기서 격려 전화가 많이 왔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우물쭈물하다 금방 시간이 간다. 옛 마한의 영광을 재현할 마지막 기회임을 인식하는 절박한 마음이 중요하다. 영암·나주를 떠나 우리 모든 영산지중해 인접 시군이 하나가 되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말이 ‘마한 특별법’이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탐라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남한 전체를 아우르는 특별법인 셈이다.

‘특별법’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다. 여기에 관련되지 않은 시군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앙정부는 정치적인 결정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또 지역 안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예산 쪼개기가 될 수밖에 없어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국고지원을 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 그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준비를 잘하여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보여야 한다. 우리 지역은 한국 고대사의 뿌리라는 마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어느 지역이 따라올 수 없는 우리 지역만이 지닌 고유의 차별성이라 하겠다. 그래야만 중앙정부든, 다른 지방정부든 감히 우리 지역에 특별법 예산이 많이 지원되어도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

지난 호에도 언급했지만 보배로운 섬, 진도라는 말이 형성될 정도로 정말 풍요롭고 평화로운 섬 진도에 후백제 후방공략에 나선 왕건의 후고구려 군대에 짓밟히면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삼별초 군대가 밀고 내려와 9개월간 이유도 모른 채 여몽 연합군과 대치, 그리고 삼별초 반군에게 협조했다 하여 몽고 군사에게 포로가 되는 수난의 역사에 이어 고려 말 왜구의 공격을 받게 되자 중앙정부는 진도군청을 아예 후방 내륙으로 옮기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진도군청은 물론 진도 주민들이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덕진에 이르러 월악에 자리를 잡고 피난 군청을 운영하였다.

조선 태종 9년(1409)까지 59년간 이곳에 머물러 있던 진도 임시군청은 이 해에 해남현 원진(院津)으로 옮겨 해진군을 이뤘으나 아직 진도에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를 받았다. 정부는 세종 19년(1437년) 진도에 남도만호 등 먼저 수군을 배치한 뒤 주민이 들어가 살도록 허락하고 진도군을 복설해 주었다. 왜구 때문에 일어난 임시 진도군청의 유랑생활이 무려 87년간 걸렸다.

시종 중심지에 진도의 임시 행정청 있어

이 과정에서 특히 59년간 피난 군청이 자리한 시종 일대에는 진도의 행정구역 흔적이 곳곳에 있다. 예컨대 시종에는 진사(珍四)리란 술어가 남아 있다. 이 말은 진도 땅 4개의 리란 뜻이다. 시종면 만수리, 태간리, 월악리, 내동리 등 4개의 리를 진사리라 하였는데, 진도군에 속하였다. 진도 사람들이 고려말엽 일본 해적들에게 쫓겨 영암 월악으로 피난 가 생활하다 다시 87년 만에 진도를 찾아든 인연으로 이 일대는 진도군 관할 구역이 되어 1906년까지 진도군 명산면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러한 관할은 해남군 삼촌면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얘기하였지만 시종 월악에 있던 진도 사람들이 진도로 귀향하기 이전에 해남군 삼산면 원진에서 28년간 흩어져 살았던 인연으로 진도 피난민들이 1437년 모두 고향인 진도로 떠나고도 진도 피난민들이 살던 땅은 진도군 소속을 삼았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해남군 삼산면에 흡수되었다. 진도군 삼촌면 땅이 오늘날의 삼산면 원진리, 송정리, 신흥리, 봉서리, 창리 등으로 삼산면의 3분의 2가 진도군 땅이었다.

한편 시종 월악은 종남면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명산면이라는 행정구역 이름이 된 태간리 명산마을은 월악에서 20리 거리에 있다. 특히 시종면 소재지가 있는 내동리도 진도군에 속한 것으로 볼 때 시종의 중심부가 진도군의 임시군청이 자리한 곳임을 알겠다. 이렇듯 진도사람들이 시종지역으로 들어와 그곳에 임시군청을 설치하고 행정을 펼치면서 시종지역은 영암이 아닌 진도의 행정 관할에 들어간 셈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종지역 사람들이 섬사람이라 하여 내륙사람들에게 하대를 받았다고 향토사학자 김정호 씨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김정호 씨는 “영암의 백제 때 이름이 월나였던 점을 돌이켜보면 시종의 ‘달애기’ ‘월롱’ 등 지명으로 보아 월나는 ‘달애기’ ‘달내’라는 시종 고을 지명이었던 것으로 자위해도 되겠다”고 썼다. 즉 김정호 씨는 영암을 뜻한 ‘월나’가 시종의 ‘달애기’ ‘달내’라는 시종 고을 지명과 관련이 있음을 얘기하였다.

시종은 마한의 중심지였다

시종은 시종의 면 소재지가 있는 내동리 1호 고분, 즉 ‘쌍고분’ 발굴조사에 2019년 7월, 2014년 4월 연이어 이웃 신촌리 9호분에서 1917년 발굴된 금동관의 영락과 가지와 동일한 편이 연이어 나옴으로써 이 고분 피장자도 신촌리 9호분과 같은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곧 두 지역이 같은 정치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두 지역의 정치세력이 연맹을 구축한 강력한 마한 연맹체가 이곳에 있었음을 확인해준다.

이러한 것은 이곳에 분포한 경주 대릉원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 고분군은 이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임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이들 고분에서 쏟아져 나오는 옥(玉)은 이곳이 마한 문화의 발상지임을 설명해주고 있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원형과 방사형 구조가 조화된 토괴(土塊)는 이 지역이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가 창출된 곳임을 입증하고 있다. 해양문화와 대륙문화가 교차하는 중심지였음을 남해신사는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시종지역은 견제를 받아 성장하지 못했다

이렇듯 시종지역이 지니는 역사적 위치는 이미 마한시대에 충분히 자리 잡았다고 본다. 이렇게 시종지역이 지니는 자체적인 힘이 크다 보니 시종을 독립된 지역으로 놔두기 보다는 인접한 시군의 관할 내로 편입을 반복하며 시종지역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을 자꾸 약화시켰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종지역을 나주로 붙였다가, 시종지역이 편입된 나주의 힘이 다시 커지니 시종을 나주에서 분리시켜 영암의 행정구역으로 옮겨 놓은 것이 이러한 추측을 하는 까닭이다.

진도군의 시종 이동은 지역성과 연관

통일신라 때 나온 영암의 명칭은 월출산의 ‘동석’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김정호 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시종의 월악이 월나악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영암을 대표하는 지역은 시종지역임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영암의 중심지인 시종에 고려 말 진도군을 이설토록 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앞으로 필자가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지만 아직 연구가 없어 어떤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역사가의 막연한 상상력으로 볼 때 고려 말 시종지역이 매우 약화되어 있어 그곳을 진도의 행정구역으로 삼아도 내부의 반발이 크지 않았을 가능성과 다른 하나는 시종지역이 마한 이래로 영산 지중해 입구에 있어 외래문화와 교류가 활발하여 문화 수용성이 높아 진도인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았을 가능성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 후자의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필자의 이러한 추측은 진도인을 섬사람이라 하대하였다고 한 김정호 씨의 주장과는 다른 입장에 있다. 곧 마한의 중심문화를 꽃피운 시종지역의 오랜 역사적 전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