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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일본의 침략행위 맞선 위대한 독립전쟁이자, 의병전쟁영암 의병사(11)
■ 한말 의병 전쟁과 호남 의병

전기 의병, 일본의 내정간섭과 개화정책에 대한 반대가 명분
중기 의병,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한 저항과 국권회복이 명분


 

의병 활동 무대 국사봉 영암군에서는 월출산 다음으로 높은 국사봉에는 을묘왜변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호남의소’라는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가 금정 국사봉을 중심으로 결성돼 활동했다. 영암에는 확인된 의병만 187명, 결성된 의병부대만 17개나 되는 등 다른 지역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은 의병 활동이 있었다.

‘의병 운동’이 아닌 ‘의병 전쟁’

조국의 제단에 목숨을 던진 의병들의 활동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필요하다. ‘의병 운동’ ‘의병 전쟁’ ‘의병 투쟁’ ‘의병 항쟁’ 등 다양한 용어들이 편의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의병 운동이나 의병 전쟁이 지닌 개념상의 혼란을 피해 ‘운동’이나 ‘전쟁’ 대신에 ‘전기 의병’ ‘후기 의병’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은 의병 항쟁이 기본적으로 ‘반침략·반개화·근왕주의’(勤王主義)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운동의 지향점이 크게 달라진 것도 중요한 이유다. ‘의병 운동’은 한말 의병 연구자들이 일찍부터 사용해오던 일반화된 용어다. ‘의병 운동’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후 노골화되는 일본의 침략 정책에 대응하는 우리 민족의 장기간 반침략 운동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면, 러·일전쟁 발발이후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서는 ‘항일독립전쟁’을 ‘의병 운동’이라 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받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의병 스스로 ‘독립군’을 표방하였던 독립전쟁이다. ‘의병 전쟁’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한말 의병 전쟁사’의 시기 구분

서세동점으로 표현되는 19세기 후반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직면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힘겹게 막았지만,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일본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유발함으로써 동아시아 역학관계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조선은 외세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사회를 변혁해야 할 이중의 과제에 직면한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개혁은커녕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를 틈타 경복궁을 점령(갑오왜변)하고, 명성왕후를 시해한 일본은 친일 정권을 내세워 단발령을 반포하는 등 전통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에 맞서 시작된 의병 전쟁이 1919년 3·1 운동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전개된 의병 전쟁은 시대 상황 및 항쟁 주체에 따라 성격에 차이가 나타났다.

의병 전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기 구분이 필요하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을미 의병’ ‘을사 의병’ ‘정미 의병’ 등 간지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이 기준은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가령 ‘을미 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충북 보은에서 일어난 문석봉의 의병 봉기를 기점으로 설정한 개념이다. 본격적으로 의병 운동이 전개된 것은 단발령 직후인 1896년 정유년이다. 그리고 1894년 갑오왜변 때 경북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등 의병봉기의 시작, 전개 과정 등을 정확히 표현하는 역사 용어로 ‘을미 의병’은 적절치 않음이 드러났다.

‘을사 의병’ 또한 지칭하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다. ‘을사 의병’은 을사년인 1905년에 봉기한 의병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1906년 병오년에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과 고광순을 ‘을사 의병’에 포함하는 등 ‘병오 의병’과 별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병오 의병’을 ‘을사 의병’으로 호칭하거나, 1904년 갑진년에 봉기한 의병도 ‘을사 의병’으로 분류하는 등 혼란이 따르고 있다.

‘정미 의병’은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일어난 의병 전쟁을 총괄하는 용어다. ‘을사 의병’과 ‘병오의병’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경우와는 달리 ‘무신 의병’(1908)과 ‘기유 의병’(1909)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은 채 ‘정미 의병’에 포함한다. 간지를 기준으로 의병 전쟁의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이러한 한계를 ‘전기 의병’(갑오·을미의 병 1894~95), ‘중기 의병’(을사 의병 1905), ‘후기 의병’(정미 의병 1907), ‘전환기 의병’(1910~1919)으로 구분하여 극복하기도 한다.

1894년 갑오 왜변부터 1896년까지 계속된 일제의 침략 정책에 저항하는 의병을 ‘전기 의병’,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이후 1905년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국권을 빼앗기는 상황을 전후하여 일어난 의병을 ‘중기 의병’,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며, 우리 행정기관을 접수하는 상황에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일어나 일제와 치열한 ‘독립 전쟁’을 치렀던 의병을 ‘후기 의병’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의병 전쟁은 1910년 8월 국권 피탈 이후에도 기세가 꺾였다고 하더라도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 때까지 계속되어 무장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이를 ‘전환기 의병’으로 성격을 지우자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한말 ‘영암의병 전쟁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나 전기, 중기, 후기 등 시간을 가지고 나눈 경우에도 남겨진 문제가 적지 않다. 전기와 중기 사이의 단절과 중기와 후기의 연속성이 잘 드러나지 않아 의병운동의 시간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갑오왜변을 빌미로 한 일본의 내정간섭과 개화정책에 대한 반대가 의병봉기의 명분이 된 전기 의병과 러·일 전쟁으로부터 을사늑약에 이어지는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한 저항과 국권회복이 의병봉기의 명분이 된 중기 의병은 그 시기 및 성격이 명확히 구분되고 있다.

반면 중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추진한 식민지화 과정의 연장선에 있다.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의병전쟁의 지향점이 달라지거나 중단된 적도 없어 성격을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의병전쟁의 주체 측면에서도 전기 의병이 주로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주도한 것에 비해 중기 의병에 있어서는 평민출신 의병장이 등장한다. 또한, 후기 의병에는 해산군인이 의병에 가담하는 등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중기 의병은 강제로 해산되거나 체포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후기 의병으로 이어져 항쟁을 계속한다.
 
근왕(勤王)을 지향한 ‘전기 의병’

전기 의병은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갑오왜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조선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미 톈진조약에서 조선에 공동출병을 약속받은 일본은 일본 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청·일 양군의 출동으로 위기감을 느낀 정부와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정부는 개혁을 약속하였고, 동학농민군은 해산하였다. 조선은 청·일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키며 내정 개혁을 강요하였다. 조선은 교정청을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에게 정무를 위임시켰다. 국정을 장악하고 있던 민비정권을 붕괴시키려는 의도였다. 또한, 일본과 가까운 개화파 인물들로 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에 격분한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국가적 위기를 인식한 것은 동학농민군만은 아니었다. 전·현직 관리, 지방 유생 등 여론 주도층들 또한 침략행위로 간주하여 투쟁에 나섰다.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청풍 출신 유학자 서상철은 격문에서 갑오왜변을 거병의 원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에 의병봉기가 확대되었을 때도 갑오왜변이 봉기의 주요 요인임을 분명히 하였다.

전기 의병을 대표하는 의병장 유인석은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졌다.”라고 통분하였으며, 홍주 의병장 김복한도 갑오왜변 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봉기하였다. 전기 의병의 또 다른 배경으로 을미사변을 든다. 일본은 왕후의 시신까지 소각하여 증거를 인멸하려 한 국제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일제와 김홍집의 친일 정권에 대하여 강한 적개심을 지녔던 백성들은 친일내각이 시해된 명성왕후에 대한 폐비조치를 내리자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9월 초 “왕후의 폐서인에 신하된 자로서 복수토적(復讐討賊) 의거는 없는가!”라는 격문이 전국 곳곳에 나붙었다. 1895년 9월 18일 충청도 유성에서 문석봉이 국수보복(國讐報復)을 명분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문석봉의 봉기는 최초의 을미 의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안동, 원주, 구월산 등에서도 봉기가 이어졌다. 변복령과 단발령 또한, 의병봉기의 중요한 요인이다. 1894년 12월 칙령 17호로 관복 개정안이 반포되었다.

1895년부터 관리들의 대례복으로 검은색 깃인 흑단령을 입게 하고, 궁에서의 예복으로 흑색의 두루마기를 입게 하였다. 일반 백성에게도 흑색의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다. 을미 변복령 요체는 흑색 두루마기를 입어 관민 구별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인석이 “천지와 성현, 선왕, 조상에 죄를 지은 것이니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오.”라고 절규하는 데에서 변복령이 봉기의 요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변복을 전통에 대한 단절로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음사’(陰邪)로 상징되는 흑색 복제에 대한 거부감도 강했다.

1895년 11월 15일 반포된 단발령은 그동안 쌓였던 항일 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유생들에게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이었다.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최익현의 외침에 당시 유생들의 인식이 압축되어 있다. 현직 학부대신 이도재마저 단발령이 공포된 직후 사직 상소를 올리고 철회를 요구할 정도로 단발령은 일부 친일관료들이 추진하였다.

유인석은 상투와 둥근 소매는 화(華)와 인(人)을 상징하고 자주를 의미한 데 비해 삭발과 변복은 오랑캐(夷)와 짐승(獸)을 상징하고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였다. 개화를 상징하는 단발을 강요하는 것은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하게 하는 처사로 받아들였다.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유생들의 반침략·반개화 성격이 의병에 뛰어들어 이를 바로 잡으려 하였음은 당연하다.<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박해현·조복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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