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22>월출산과 관음신앙(下)

월출산 아래 자리한 구림의 상대포나 시종의 남해포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진 해양활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이 월출산의 관음신앙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태안의 백화산 마애불과 변산의 관음봉(사진 오른쪽).

불교가 처음 유입되었을 때 월출산이 신앙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관음신앙이 주로 신앙되었다. 월출산 관음신앙을 ‘혜현’(惠現)이라는 승려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혜현 스님이 왜 월출산에서 은거하며 관음신앙을 공부하였는지 살펴보려 한다. 혜현에 대해서는 ‘속고승전’과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백제 고승 혜현의 월출산 구도 활동

삼국유사는 고려후기 승려 일연(1206~1289)이 저술한 것으로, 불교와 관련된 승려들의 일화가 많이 담겨 있다. 그래서 ‘유사’(遺事) 즉 ‘남겨진 얘기’라 한 것이다. 이 책은 단군신화가 수록된 최초의 역사서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승려 혜현(釋惠現)은 백제인이니, 어려서 출가하여 애써 뜻을 모아 법화경을 외는 것으로 업을 삼았고, 부처께 기도하며 복을 청하니 영험한 감응이 실로 많았다. 겸하여 삼론(三論)을 오로지 공부하여 오묘한 맛을 알므로 신명(神明)에 통하였다. 처음에 북부 수덕사에 살았는데, 신도가 있으면 불경을 강론하고, 없으면 불경을 암송하였으므로 사방 먼 곳에서도 그 풍도를 흠모하여 문밖에 신발이 가득할 정도로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차츰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마침내 강남 달라산(江南 達拏山)에 가서 거처하였는데, 산이 높고 바위는 험하여 왕래가 힘들고 드물었다. 혜현이 정좌하여 속세의 생각을 잊고 산중에서 (일생을)마치었다. 동학(同學)들이 시체를 운반하여 석실 안에 안치하였더니 호랑이가 그 유해를 다 먹어버리고 다만 머리뼈와 혀만 남겨두었다. 추위와 더위가 세 번 돌아와도 혀는 오히려 붉고 연(軟) 하였다. 그 후에 변하여 붉고 단단하기가 돌과 같았다. 승려나 속인들이 이를 공경하여 석탑에 간직하였다. 이때 속세 나이 58세였으니, 즉 정관(貞觀) 초년(初年)이었다. 혜현은 중국으로 가서 배운 일이 없고 고요히 물러나 일생을 마쳤으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전기가 쓰여 당나라에도 그 명성이 높았다.”

혜현이 정관 초기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정관초’라고 하였으므로 그의 활동 시기는, 6세기 말 7세기 초가 아닌가 여겨진다. 혜현이 처음에 수덕사에 주석하였을 때 법화경을 주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그는 명성이 높아져 일반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그는 속세의 인연을 벗어나 수행에 집중하기 위해 수덕사를 떠나 강남의 달나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북쪽 수덕사라고 한 것은 백제의 수도가 이때는 부여에 있어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수덕사에서 ‘강남 달나산’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달나산’은 월출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산이 높고 바위가 험하여 왕래가 힘들었다’는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월출산임이 분명하다. 전남지역은 6세기 중엽 성왕 때, 마한과 백제가 통합되었기 때문에 혜현이 월출산에 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관음신앙의 성지 월출산을 찾다

혜현이 월출산을 수행 장소로 여기고 내려온 까닭은 월출산이 관음신앙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인식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마라난타 전에 월출산은 관음이 머문 곳이라고 되어 있었다. 덧붙여 관음이 머무는 곳은 바닷가의 바위산이라는 입지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월출산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혜현이 수덕사에서 월출산으로 거처를 옮겨 수행에 전념하려 한 것은 그의 신앙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원래 혜현이 머물렀던 수덕사에서 가까운 태안에 있는 백화산이 관음의 상주처로 인식되어 관음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백화산에 있는 관음을 주불로 하여 새겨진 6세기 말 무렵의 마애불을 통해 그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혜현은 관음신앙이 성행하던 태안 근처 수덕사에서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 역시 일찍부터 관음신앙에 익숙하였을 것이다. 특히 그가 독송하던 ‘법화경’ 가운데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관음신앙의 근본 경전이었으므로, 더욱 관음 신앙에 빠져들었다. 혜현이 이러한 그의 관음신앙을 깊이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경전에 나오는 관음이 머물렀던 곳과 흡사한 월출산을 찾았던 것이라 여겨진다. 월출산이 아마도 관음신앙이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와 뿌리내린 곳임을 확인해 준다. 이러한 혜현의 행적은 당시 백제에서 활동한 법화 승려들의 추세가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는 점과 법화 신앙 자체가 가지는 실천적 면모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관음신앙은 해양신앙과 밀접한 관계

백제에서도 대체로 해안에 있었다는 관음의 상주처와 비슷한 곳에 관음 도량을 열었을 것이며, 태안의 백화산은 그러한 조건에 부합하였다. 백화산 바로 이웃에는 중국으로 가는 주요 항구인 당진이 있다. 예부터 중국과의 교통의 요충지로서 해로를 통한 교역이 가능한 곳이다. 그 인근 태안에 관음 도량을 세운 현세적 의미는 항해를 통한 안전을 기원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관음신앙이 항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법화경에 있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의 내용을 통해 이 까닭을 알 수 있다.

“혹은 큰물에 떠내려가게 되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되며, 혹은 백천 만억 중생이 금·은·유리·자거·마노·산호·호박·진주 같은 보배를 구하려고 큰 바다에 들어갔을 때, 가령 폭풍이 일어 그들의 배가 나찰귀들의 나라에 포착되었을지라도 그 가운데 만일 한 사람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여러 사람이 다 나찰의 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니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이름하느니라.”

이에 따르면 큰 물에 빠지거나 보물을 얻기 위하여 큰 바다에 들어갔다가 폭풍과 같은 고난에 직면하였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세 이익적인 관음신앙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통해 바다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관음신앙이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 졌음을 알 수 있다. 관음은 해상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다양한 형태로 믿어온 해양신앙의 한 사례로서 그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 세워진 거대한 해수관음상도 이 지역에 형성된 관음신앙의 표현이다. 변산반도에 보이는 관음신앙의 성격 역시 해양활동을 기반으로 한 이들의 해양신앙의 사례라 하겠다.

마한의 융성한 해상활동을 상징하다

월출산을 중심으로 행해져 온 관음신앙은 결국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부합하여 생겨난 것이다. 영암지역은 15세기 이후 이루어진 대규모의 간척으로 인하여 지리적인 변화를 겪지만, 그 이전에는 해로상의 요충지로서 월출산 아래까지 바닷물이 통하던 곳이다. 특히 월출산 아래 자리한 구림의 상대포나 시종의 남해포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진 해양활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이 월출산의 관음신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월출산 관음신앙 얘기가 마라난타 전에 보이는 것은, 불교 초전 당시부터 이곳에 형성된 해양신앙을 불교신앙으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 여겨진다. 구림에서 발견된 매향비 역시 그곳이 산곡수(山谷水)와 해수(海水)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의 활발한 해양활동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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