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 경 학산면 유천마을 월출산힐링팜(향기찬 꽃차) 버들샘영농조합법인 대표 학산면 생활개선회부회장

전 세계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초비상이다. 작년 12월 12일 중국 우한 지역에서 처음 발생했지만, 지금은 전 세계 27개국으로 감염이 번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확진 환자 28명에 육박한 상황이다. 이미 발생지 중국을 넘은 세계적 확산에 정부도 중국 외 코로나19 감염국에서 입국하는 승객들에게 특별 검진을 확대했다. 또한 국내 확진 환자들의 동선을 체크하여 소독과 격리를 확대하는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민들도 만일을 대비하여 가급적 ‘집콕’ 자발적 자가격리 중이다.

코로나19 비상사태는 조만간 극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바이러스가 무차별적 공기 중 전염 위험은 없어 마스크, 손소독 등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고 확진자가 접촉한 공간을 소독하면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추가 감염자의 증가 속도가 완화되고 있고, 이미 완치되어 귀가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또한 가까운 시일 내 치료약과 백신이 개발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특히 사스·메르스를 겪으면서 국제보건기구(WHO)로부터 모범 국가로 칭찬받을 만큼 대중보건 의료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고 나름 감염 초기부터 잘 대응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험사회’의 일반적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사스·메르스에서 보여준 전 지구적 차원의 위험을, 후쿠시마 원전사고, 미세먼지 등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이 만들어 낸 새로운 위험을 우리는 코로나19 사태에서 다시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1986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제기한 ‘위험사회’는 코로나19와 같은 위험이 중심이 된 사회를 일컫는다. 코로나19의 위험이 이미 사회 모든 영역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서 드러난 ‘위험사회’ 특징들

첫째, 코로나19는 파괴력이 크고 전염성도 크다는 점에서 ‘위험사회’(Risk Society) 특징을 보여준다. 최근 미국·캐나다 등 독감으로 인한 수만의 사망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서 발생한 위험이라면 코로나19의 위험은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점에서 심지어 민주적이다. 수만이 죽어나는 독감은 뉴스에도 안 오르지만 아직 한 명도 죽지 않은 코로나19에 대해서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총력 대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코로나19라는 위험으로 우리는 ‘세계위험공동체’의 성원이 되었다.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고립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어떤 국가도 이 위험에서 혼자 빠져나갈 수 없다. 코로나19는 중국의 우한지역에서 발생하였지만, 결코 우한지역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며 전 세계적 위험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우한 폐렴 운운하며 우한, 중국의 문제로 바라보는 일각의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태도는 ‘위험사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셋째, 코로나19 비상사태에서 확인시키듯이 위험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높아졌다. 더 이상 시민들은 수동적으로 정부나 전문가들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 직접 위험의 원인과 대책을 찾으려 적극 나서고 있다. 초기 발생을 쉬쉬한 중국에 대해 비판하고, 온갖 가짜 뉴스에 맞서고 있다. 우한교민 수용에 대한 아산·진천 주민들의 항의와 시위도 사실은 정부나 질병본부가 코로나19의 위험에 대해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사전 협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위험사회’는 시민들의 능동적 대처와 연대를 요구한다.

넷째, 코로나19의 위험으로부터의 ‘안전’이라는 가치가 최우선이 되면서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밀려났다는 점에서 ‘위험사회’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각국 정부는 중국인 입국 금지 등과 같은 인종 차별적 강제조처들을 취했다. 중국인들의 상점 출입금지, 아시아 학생들의 등교 금지 같은 인종차별 조처들도 자행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인 혐오증이, 유럽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 차별적인 언행들이 넘치고 있다.

또한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배려 없이 확진자의 신상털기가 자행되기도 하였다. 만일 코로나19 사태가 좀더 장기화되거나 악화된다면 이러한 불안과 공포, 위험으로부터의 보호에 대한 요구가 자칫 전체주의를 등장시킬 위험도 있지 않을까? 과거 유태인에 대한 혐오를 이용한 나찌즘이나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에 대한 혐오 학살을 이용한 일본 군국주의 득세가 바로 그런 사례이다.

다섯째, 코로나19에서도 전 세계적 위험의 피해를 고스란히 개인에게 전가하는(위험의 개인화) ‘위험사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안전을 위해 개인들이 자진해서 강제 격리를 요청하고 자진해서 병원에 신고하고 검사받는 걸 오히려 감사해 하는 현상이 출현하고 있다. 만일의 피해는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가까운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피해자들도 지금껏 일본사회에서 거의 왕따이며 정부나 지역사회로부터 완전히 냉대받으며 고스란히 개인들이 피해를 떠안고 있다 한다.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세월호 사례에서 이미 우리는 겪지 않았는가?

‘과학기술, 풍요의 패러다임’ 성찰 요구

결국 이번 코로나19에서 드러나는 ‘위험사회’는 한 나라, 개인들이 넘어설 수 없는 세계적 위험들이 시시각각 발생하고 있는 사회이다. 그리고 이 위험들이 과거와 달리 과학기술 발전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한 결과 발생한 새로운 재앙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위험사회’의 위기에 대해 보다 근본적 성찰 없이는 위험이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민주사회를 뒤흔들고 더 큰 위험을 키울 수 있다.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의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패러다임의 터널 끝에 어떤 위험이 기다리는지 최대한 알아내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과감히 그 위험한 터널로의 진입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근본적 성찰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또한 이 사회를 그러한 발전 패러다임으로 이끌어온 전문가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위험(risk)들이라면, 더이상 그런 전문가들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시민들도 직접 나서서 국제적으로 연대하고 협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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