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남해신당(下)

시종의 남해신당과 양양의 동해묘 시종면의 남해신사(사진 왼쪽)는 동해의 동해묘(강원도 양양. 사진 오른쪽)와 서해의 서해단(황해도 풍천)을 포함한 우리나라 3대 해신제를 지내던 장소 중 한 곳으로 해신제 터가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다. 마한이래 고려·조선을 거쳐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제가 열리고 유구가 확인된 사당은 남해신당 뿐이다.

마한시대 존재를 확인한 출토유구

고려 초에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제가 남해신당에서 열렸음이 기록에서 확인된 이상 적어도 그 당시 남해신당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신당 터를 발굴할 때 조선 이후의 유물만 나오고 있을까? 1997년 발굴 당시, 묘당 중심부는 거기에 있는 개인 묘 때문에 발굴하지 못했다 한다. 혹 그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그러할 확률보다는 오히려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중수작업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들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그런데 보고서에 따르면 주거지 유구가 1~4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된다 한다. 그렇다면 마한시대에 그곳에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묘당 옆에 신당 운영과 깊이 관련이 있는 우물터가 확인되는 것 또한, 이곳에 오래전부터 신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국제무역항을 입증하는 출토 화폐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상평통보, 관영통보, 도광통보 등 한국, 일본, 중국에서 17, 8세기에 사용된 화폐들이 출토되었다. 출항에 앞서 선원들이 이곳 신당에 와서 해신제를 지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 후기까지도 남해포가 국제무역이 이루어지던 중요한 항구였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양양 동해묘의 중수비에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를 지냈다”라고 쓴 것을 보면 바다의 용왕께 제를 지내는 해신제가 삼국시대에도 이미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동해묘는 고려 후기에 남해신당,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과 함께 3대 해신당으로 알려져 있다. 동해묘에서 주관한 해신제가 신라 때부터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국제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남해포에는 이미 마한 시기부터 해신제를 올리는 제당이 당연히 있었을 법하다.

한편, 남해신당이 고려 현종 때 ‘대사’(大祀)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바로 잡아야 한다. 신라는 삼산(三山)을 대사에, 악진해독을 중사(中祀)에, 명산을 소사(小祀)에 각각 등재하는 등 국가의 사전체계에 산악신앙을 편입하였으나 고려는 대·중·소사와 함께 잡사(雜祀)를 별도의 독립 항목으로 만들어 놓고, 잡사에 압병제(壓兵祭), 초(醮), 남해신(南海神), 성황(城隍), 천상제(川上祭), 노인성(老人星), 5온신(五溫神), 명산대천(名山大川), 기자사(箕子祠),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 등으로 분류하였다. 남해신을 잡사에 포함시킨 셈이다.
 
고려시대 유일한 해신 사전(祀典)

고려사에 ‘남해신’만을 모시는 사전(祀典)이 유난히 별도로 편성되어 있는 까닭이 궁금하다. ‘동해신’ ‘서해신’ 등 이른바 다른 해신과 관련된 사전은 없다. 남해신을 독립적인 사전체계로 만든 것은 남해신당의 제의를 특별히 중시했음을 의미한다. 남해신당을 유난히 중시한 까닭이 궁금하다. 당시 기록에는 “해양도의 정안현에서 산호수를 두 번이나 바쳤으니 남해의 용신에게 마땅히 사전을 승격시켜 그 현공을 표창할 것이라”라고 하여 산호수를 공납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안현은 고려 인종 이전에는 영암지역에 속해 있었으므로 영암지역에서 산호수를 공납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옳다. 곧 공물 때문에 사전으로 승격시켰다는 것인데, 아무리 공물을 진상하였다 하여 그곳에 있는 신사를 국가의 사전으로 승격시켰다고 살피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필자는 남해신당이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지 않나 한다. 해상 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왕건은 해신을 위한 치제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남긴 훈요십조에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섬기라”라 한 구절에서 ‘용신’을 섬기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용신은 수신(水神) 혹은 해신(海神)을 지칭하는 데, 이처럼 태조 왕건이 해신을 섬기는 것을 강조한 것은 5악, 명산, 대천의 신에 제사 지내는 것만 사전에 편성하고 용신을 제외하였던 이전의 통일신라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태조 왕건이 ‘해신’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말하자면, 고려 초에 별도의 사전체계를 미처 확립하지 않은 상황에서 태조 왕건이 팔관회를 통해 해신당의 제의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고려 국초에는 남해신당만 별도의 사전체계에 편입되어 있을 뿐, 양양의 동해묘, 풍천의 서해단 언급은 없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가 “지금 있는 동해, 서해, 남해의 해신제를 주관하는 신사가 양양, 풍천, 남해에 있는데 모두 개성을 기준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재고를 해야 한다.”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곧 개성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이 고려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동해묘·서해단은 지방관이 치제(致祭)

고려사절요에 원종 때 양양에 있는 동해신사를 그 지역 지방관이 맡아 제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에 들어 비로소 동해의 해신당도 관청에서 제를 주관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 문인 임춘의 ‘익령(양양)으로 가는 길에’라는 글에 “산천에 명승 많으나 풍속은 중국과 달라 (중략) 풍년이라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데 진귀한 산물로 바닷고기가 풍성하구나. 얕은 물에는 찬바람 맞으며 오리가 뜨고 깊은 숲에는 석양 속에 까마귀가 운다. 요사(妖祠)에서 초무(楚舞)를 올리는데”라 하여 당시 동해신사에서 행해지는 해신제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동해신사는 주로 안전항해를 기원한 남해신당과 달리 풍어제의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임춘이 ‘요사’라고 하여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임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동해신사에서는 국가나 관청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제의가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별도의 사전체계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국제가 아닌 지방관이 제를 주관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부안 격포에서는 국제가 아닌 지방관이 주관하는 수준의 해신제가 치러졌다. 서해단도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동해신사와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이 동·서해에 추가되었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인 사전체계가 수립되어 국제가 되어 있는 남해신당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남해신당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가 크다.

조선시대 때 국왕의 향촉까지 받아

남해신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사전체계에 편입되어 있었다. 세종 때 “나주 남해는 중사이고 묘 위판을 ‘남해지신’이라고 쓰라. 금성산은 소사이고 묘 위판은 ‘금성산지신’이라고 쓰라. 제사는 소재관(나주목사)이 하라”라 하였다는 기록이나,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나주목조에 “남해신사, 사전에 중사(中祀)로 삼아 봄·가을에 국왕이 향을 내려 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祀典載中祀春秋降香祝致祭)”라는 기록에서 이미 조선 초에 남해신당이 중사(中祀)에 편입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남해신당은 고려에 이어 조선에도 국가의 사전체계에 편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해신당이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이 수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하였음이 느껴진다.

동해묘도 남해신당처럼 중사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남해신당처럼 ‘降香祝致祭’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고, 풍천의 서해단은 ‘降香祝致祭’라는 표현은 있지만 사전편입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사전에 편입되고 국왕으로부터 제물까지 받은 신당은 남해신당이 유일함을 알 수 있다. 마한이래 고려·조선을 거쳐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제가 열리고 유구가 확인된 사당은 남해신당 뿐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