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2>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남해신당(上)

해신제와 남해신당 시종 남해포구는 마한시대부터 중국, 가야, 왜 등 여러 나라 선박들이 드나들었던 국제무역항으로, 선박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사당(남해신당)이 있었다. 남해신사 제례보존위원회는 2001년 복원된 남해신사에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해신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고 있다.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남해신당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2019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정말 뜻깊은 한 해이다. 우리의 뜨거운 독립 에너지를 유감없이 발휘한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그 민족적 열기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 최초의 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비롯된 한·일 양국 사이의 또 다른 ‘전쟁’으로 인하여 ‘1919년’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더욱 우리에게 깊이 다가왔다. 군서면 구림과 영암읍 두 곳에서 전개된 3·1운동은 조직적이면서 대규모로 이루어져 민족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자랑스럽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암의 힘은 바로 직전에 일어난 한말 의병 전쟁 과정에서 전남의병사의 커다란 줄기를 형성한 ‘호남의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영암인의 내면에 형성된 강한 정체성이 발현되었다. ‘마한 왕도’ 출신이라는 역사적 자존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의향 영암의 전통을 새롭게 인식해야

그러나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넉넉하지 못하였다. 1920년 박은식 선생이 3·1운동의 현황을 분석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전국 218군 가운데 211군이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영암은 그 211군에 누락되어 있는데, 영암을 ‘영광’으로 잘못 이해하여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전남의병사의 찬란한 역사를 장식한 영암의병 또한 그동안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 있었다는 점이다.

영암군과 영암문화원의 노력으로 ‘영암 의병사’를 일부나마 복원한 것은 무척 다행으로 여긴다. 12월 초에 있었던 전남교육청 교원연수에서 필자는 영암의병사를 중심으로 한말 전남 의병사를 얘기하였다. ‘최초의 여성의병장·부부의병장·남매의병장’의 칭호가 붙여진 양방매에 대한 관심은 단연 압권이었다. 하루바삐 양방매에 대한 연구가 정리되고 풀밭으로 남아 있는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영암 의병의 역사를 더욱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또한 2019년은 ‘마한의 심장, 영암’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일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7월 초에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에서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왕관과 동일한 금동관편이 출토되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마한 왕국이 실존하였음을 확인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연구를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나주시와 영암군이 별도로 개최하던 ‘마한 축제’가 2020년부터 ‘나주·영암 공동축제’로 통합 발전하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마한특별법이 가야특별법과 공동법안으로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마한특별법은 궁극적으로 영암 시종지역에 이미 조성되어 있는 마한역사문화공원을 일본의 요시노가리 공원처럼 만들려는 데 있다. 아마도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공원 조성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제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마한 지중해의 심장부에 있는 영암의 역사적 위치와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종지역이 지니는 역사적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때 주목되는 것은 마한역사공원 안에 있는 ‘남해신당’의 존재이다. 지금도 10월에 열리는 마한축제는 그곳 신당에서 제를 올리면서 시작되고 있다. 해신제가 마한과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산지중해 입구에 있는 남해포는 화려한 영산지중해 역사와 역사적 궤를 같이하고 있다. 영산지중해는 중국, 일본, 가야, 동남아시아 등 여러 지역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항구 입구에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해신당이 일찍부터 존재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실제 유물로 확인되고 있는 전북 부안의 죽막동 제사유적도 마한시대인 3∼4세기 그곳에 해신당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히려 항로의 중요도로 따지면 남해포는 변산반도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곧 남해포의 해신당이 마한시대에 이미 있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부안 죽막동 세계문화유산 등재 노력

그런데 최근 전라북도는 부안의 죽막동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는 노력을 체계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지닌 남해신당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문제 역시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때라 생각한다. 실제 유인학 마한축제추진위원장께서 이 문제를 필자에게 꺼낸 적이 있었다. 필자 역시 부안의 사례를 소개하며 남해신당의 해양사적 위치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차분하면서도 서둘러 준비해야 함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남해신당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현재 남해신당의 설명이 마한과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진다면 마한역사공원 조성과 남해신당은 직접 관련이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남해신당과 마한과의 관련성을 살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마한역사공원 조성의 중요한 명분도 되고 나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첫 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해신당의 역사적 가치 매우 높아

주지하다시피 영암지역이 마한의 심장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산지중해 입구에 위치한다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국제무역항인 상대포, 남해포는 마한시대부터 기존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되어 새로운 고유의 문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특히 남해포구에는 마한시대부터 중국, 가야, 왜, 심지어 신라 등 여러 나라 선박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이처럼 선박들이 드나드는 곳에는 선박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사당이 있었을 법하다. 말하자면 남해포에 이러한 신당이 세워져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추측은 지금도 ‘수성당’이라는 제각이 있어 해신제를 올리고 있는 전북 부안 변산반도 해안 절벽 위에 있는 죽막동 제사유적을 통해 알 수 있다.

1992년 발굴 조사된 죽막동 유적지에서 4, 5세기 마한시대에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많은 선박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였던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비록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3~6세기 중국 남조 계통의 도자기, 5~6세기 제물로 쓰인 토마(土馬), 대가야계 금속 공예품, 구연부에 돌대를 두르는 영산강유역의 단경호 등 유물들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중국, 가야, 백제, 심지어 왜 선박들이 항해하는 주요 항로였다고 하는 것을 알겠다. 말하자면 죽막동 신당은, 이 해역을 항해하던 각국 선박들이 이곳 신당에 들러 무사항해를 기원하였던 곳이다. 이러한 해신당이 마한의 대표적 국제무역항인 남해포구에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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