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
■한국 고대사의 뿌리, 영암(3)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 전경 영산강 유역 고대 마한시대 최상위 수장층의 고분으로 확인된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전라남도기념물 제83호)은 영암이 ‘마한의 심장부’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의향, 영암’은 오랜 역사적 전통 속에서 형성된 역사의식이 밑거름이 되었다.

마한의 중심지임을 웅변하는 시종 고분

‘의향, 영암’의 빛나는 훈장은 오랜 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된다. 영암은 ‘마한의 심장부’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나오고, 백제가 나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원형’ 임을 말해준다. 경주 대릉원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와 숫자를 자랑하는 영암 시종 대형고분들은 이곳이 마한 중심지임을 웅변한다. 쌍무덤에서 출토된 신촌리 9호분과 금동관 편은 이러한 주장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한국사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는 마한의 중심지, 영암에 남다른 ‘정체성’이 뿌리내려져 있는 까닭이다.

영암에 있는 마한왕국의 구체적인 실체는 잘 알지 못한다. 천관우 선생은 일찍이 언어학적으로 마한 소국의 하나인 ‘일난’(一難)을 영암 지역에 비정하였다. 그는 ‘일난’의 옛 음 iet-nan이 영암의 옛 이름인 ‘월나’(月奈)의 음 ngiwdt-nai와 비슷한 것으로 추측하여 영암 지역에 ‘일난국’이 있다고 하였다. 천관우 선생 추론 위에 이 영문은 지석묘 밀집 분포지가 있는 영암 덕진·신북·군서·서호·학산·미암면 일대가 ‘일난국’의 영역이라고 추론한다. 영암에는 시종천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반남지역 연맹체와 통합한 대국 ‘내비리국’과 영암천을 중심으로 나머지 지역을 아우르는 소국 ‘일난국’ 등 두 개의 연맹왕국이 있다.

영암군청 홈페이지에는 당시 마한왕국으로, ‘월지국’이 이곳에 있다고 하여 위에서 살핀 것과는 달리 설명되어 있다. 아마도 백제 때 이 지역이 ‘월나군’이었다고 하는 데서 착안하여 ‘월’자라는 동음어에 기준을 둔 것 같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있는 ‘월지국’은 현재 충청남도 천안 지역의 ‘목지국’을 말하는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한편 거대한 신연리 9호 고분을 비롯하여 태간리 전방 후원분·내동리 고 분 등 현재까지 확인된 대형 고분 15기 대부분이 ‘영산지중해’에 연한 영암 시종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 지역에 커다란 왕국이 있음을 알려준다. 반면 다른 영암에 자리 잡은 ‘일난국’ 규모를 밝혀줄 유적들은 찾아지지 않는다. ‘일난국’ 연맹체가 강진·해남 반도에 자리 잡았던 마한 남부연맹의 대국 ‘침미다례’와 ‘내비리국’ 사이에 끼어 있어 큰 세력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리적 특성으로 독자적 문화역량 갖춰

영암 지역에는 ‘내비리국’이라는 대국과 ‘일난국’이라는 소국이 서로 경쟁 내지는 협조하면서 연맹을 유지하였다. 전자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언급한 ‘대국’이고, 후자는 ‘소국’이다. 마한 54국 가운데 두 연맹왕국이 한 지역 내에 자리 잡은 것은, 이 지역이 정치·경제적으로 강성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영암 남쪽은 월남촌, 서쪽은 구림촌으로, 신라 때 이름난 촌락이다. 이 지역은 서남해가 서로 맞닿는 곳이어서 신라에서 당으로 들어갈 때는 모두 이 고을 바다에서 배로 출발하였다”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영암지역은 영산 지중해의 길목에 위치하여 물산의 유입 이동이 빠르다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다. 게다가 다른 내륙의 평야 지대와는 달리 하천 부유물과 퇴적물 유입이 증가함으로써 하상보다 높아져 조수(潮水)의 영향을 받지 않은 비옥한 노출 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경제기반을 토대로 낙랑과 왜 등 이웃 국가와 교류를 통해 융합된 창조적인 문화는 ‘영산강식 토기’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문화 역량을 창출해 냈다. 5세기 초 이 지역 출신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왜에 건너가 일본의 고대 사상 형성에 도움을 준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이 지역은 부강한 경제기반과 개방성이 강한 지리적 여건이 융합되어 독자적 문화 역량이 형성되어 있다.

6세기에 이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을 때, ‘월나군’이라 하여 ‘郡’이 설치된 것은, 이 지역의 정치적 힘이 강력하였음을 알려준다. 저자는, 고려 때 이미 ‘소금강산’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월출산 이름이 신라 때 ‘월나악’으로 불렸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는 인근에 있었던 ‘半奈夫里’의 ‘나’와 연관이 있다. ‘월나악’ 명칭은 이미 내비리국이 있었던 마한 시대부터 월출산의 명칭이었고, 군 명칭 ‘월나악’ 또한 백제 때 붙여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통일신라 때 ‘월나군’ 명칭이 ‘영암군’으로 바뀐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월출산 조에 ‘動石’ 이야기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최근 그 ‘동석’을 확인했다는 기사를 보았지만, 월출산 ‘동석’과 관련된 인터넷상의 기사들을 검색하고 영암출신 인사들에게 확인한 바에 의하면, 1897년에 나온 ‘호남읍지’에 실려 있다고 하는 등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얘기와 전승이 혼재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동석’ 관련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월출산 구정봉 밑에는 바위가 셋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 데 높이가 한 장이고, 둘레는 10여 위가 되는 데 서쪽으로는 봉우리를 향하고, 동쪽으로는 절벽으로 향해 있는데 1,100명이 들려 해도 꼼짝 않는데, 한 명이 밀면 움직인다. 아무리 절벽 밑으로 밀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靈石’ 즉 신령스러운 바위라 일컫는다. 군 명칭이 여기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영암’ 이름이 ‘영석’의 ‘석’ 자를 같은 훈인 ‘암’으로 바뀐 데서 유래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남해안 섬 대부분을 관할했던 ‘영암’

그런데 영암군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 ‘월나군’의 명칭을 바꾼 것이라 할 때, 이미 ‘동석’의 존재를 알고 군 명칭을 개칭할 때 사용된 것이라 여겨진다. 경덕왕 때 추진된 행정구역 개편, 예컨대, 충북 길동군을 영동군으로 고친 것처럼 ‘漢化정책’은 전국의 모든 행정구역을 한식으로 고친 것으로, 이전 지명과 상관이 있거나 ‘보성군’처럼 중국의 지역 명칭을 차용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월출산 ‘동석’과 연결지어 군명을 정한 경우에는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이는 이 지역의 정치 세력이 백제에 편입된 후에도 토착성을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말하자면, 바로 이웃 ‘내비리국’은 백제와 통합될 때 ‘반내부리’라 하여 명칭도 절단되고 행정단위도 ‘현’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때 군으로 승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바로 이웃한 영암의 정치 세력들은 이러한 파고를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郡’의 위세를 잃지 않고 고려시대까지 이어 나갔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암군 조에는 영암군의 위치에 대해 동쪽으 로는 나주 경계와 14리, 북쪽으로는 나주 경계와 30리, 남쪽으로는 강진현 경계와 17리, 해남현 경계와 75리, 서쪽으로는 해안이 50리, 경도 즉 한양과는 822리 떨어져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노도·달목도·보길도·횡간도 등 영속된 섬 이름이 24개나 영암군 조에 기록되어 있어, 영암이 영산 지중해에 연해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신기하게 비칠 수 있다. 이 섬들 가운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보길도와 횡간도 등 현재 완도군에 속한 섬도 보인다. 적어도 조선 초기 영암군은 남해안 섬 대부분을 관할했고, 인근 해남현·강진현을 예하에 둘 정도로 大郡이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형성된 이 지역의 역사 의식은 올곧은 삶을 지향하는 밑거름이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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