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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묘는 ‘전라도 정신’의 원형이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9>지석묘 문화와 전라도 정신(上)
구조적인 특징에서 전남지방의 지석묘는 두 개 지역군으로 설정된다. 이를테면, 구조는 물론 출토유물의 특성에서 영산강유역과 보성강유역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영산강유역에서는 석관형 석실이, 보성강유역에서는 석곽형 석실이 많다. 또 보성강유역에서는 석검 등 부장풍습이 유행하고 있으나 영산강유역에서는 부장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사진은 고흥 중산리 지석묘군(위)과 영암 서호 엄길리 지석묘(아래 사진).

며칠 전, 목포의 한 유선방송에 영암문화원 김한남 원장과 함께 출연하여 마한 특별법 및 마한유적 발굴조사와 관련된 주요 이슈를 논의하였다. 김 원장이나 필자 모두 한국 고대사의 뿌리인 마한의 심장부가 영산강 유역이었다는 인식에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아직도 상당수 이 지역 출신 연구자조차 마한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인식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잠시 주제를 바꾸어 최근 이야기되고 있는 ‘전라도 정신’의 원형을 다루고자 한다. 광주와 전남은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정신’이라는 용어 대신 ‘광주 정신’이라는 말을 부쩍 쓰고 있다. 원래 필자가 영산강유역의 고대사, 즉 마한사를 살피려 했던 주요 동기가 전라도 정신의 실체를 밝히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관련 주제를 살필 때마다 ‘전라도 정신’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를 언급해 왔다.

‘전라도 정신’은 무엇인가! ‘나눔’과 ‘배려’의 ‘공동체 정신’, 올곧음을 실천한 ‘정의감’이라고 이야기들 한다. 말하자면, 고유한 전통을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형성된 이 지역의 정체성이 밑거름되어 나타났다. 곧 선사이래 우리 지역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상황이 쌓여 만들어졌다 하겠다.

우리 지역은 세계 고고학계가 놀랄 정도로 ‘지석묘’가 보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밀집 분포되어 있고, 뒤이어 들어선 ‘옹관묘’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왜 우리 지역에 이러한 고분들이 오래도록 집중되어 있을까? 거기에는 필시 어떤 까닭이 있을성 싶다. 고분은 사회의 특질을 살피는 데 매우 유효하다. 그러므로 지석묘이든, 옹관묘이든 특정 지역에 그것이 오랫동안 분포된 것은 그 지역의 정치, 사회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거쳐 국가의 기틀이 형성된 청동기 시대의 정치, 문화적 특성을 대표적 묘제인 지석묘를 통해 밝혀 보려는 것이다.
 
지석묘 밀집지에 마한 연맹체가 성립되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남지역 지석묘 군(群)은 조사된 것만 2만여 기로, 그 숫자와 밀집도가 가히 세계적이다. 전남의 일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밀집 분포된 지석묘는 17여 개 지역 군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밀집 군이 천관우 선생이 마한 소국으로 위치 비정한 전남지역 13곳 가운데 10개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고흥반도의 ‘초리국’, 보성 복내의 ‘비리국’ 등 마한 연맹왕국이 위치한 곳도 지석묘 밀집지역과 일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지석묘 밀집 분포지와 마한시대의 정치 중심지를 살피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다. 지석묘를 축조한 집단과 마한왕국을 건설한 집단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전남지방의 곳곳에서 지석묘 축조집단들은 새로운 문화의 유입과 사회변동 과정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를 철기 시대에 속한 마한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어려움도 따른다. 다만, 전남지역의 경우 지석묘의 하한이 기원전 3∼2세기 초이고 마한의 상한은 기원전 5세기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어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다. 보성강 유역의 경우는 기원후까지도 지석묘를 주 묘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보성강과 영산강유역 지석묘는 차이가 있다

구조적인 특징에서 전남지방의 지석묘는 두 개 지역 군으로 설정된다. 이를테면, 구조는 물론 출토유물의 특성에서 영산강 유역과 보성강 유역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석관형 석실이, 보성강 유역에서는 석곽형 석실이 많다. 보성강 유역에서는 석검 등 부장 풍습이 유행하고 있으나 영산강 유역에서는 부장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두 지역은 전북지방이나 경남지방과 연관성을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전북지방의 지석묘는 석관형 석실이 많고 석실에서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점은 영산강 유역과, 경남지방 지석묘는 석곽형 석실이 많고 또 석검이나 붉은 토기 등이 석실 내에 부장되고 있는 점은 보성강 유역의 지석묘와 성격이 비슷하게 보인다. 이를 통해 전남·북이 동일 문화권을, 그리고 서부 경남과 전남 동부지역은 섬진강을 경계로 구분되고 있지만,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지리적 환경의 반영이라 하겠다. 전남지역은 북으로는 노령산맥과 동으로는 소백산맥이 에워싸고 있는 형상이다. 또 서, 남으로 바다와 인접되어 있고, 영산강은 전남 서북부 지역을, 보성강은 동남부지역을 각각 관통하고 있다. 이처럼 산맥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은 독특한 지석묘 문화를 성립시킬 수 있는 여건으로 작용하였다.
 
보성강유역은 지석묘가 주된 묘제였다

한편 영산강 유역과 전남 서부지역에서는 철기 시대의 대표적 묘제인 주구토광묘와 옹관묘 등이 조영되고 있는 데 반해, 남해안과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이들 묘제의 흔적이 거의 찾아지지 않은 채 지석묘만 계속 남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들 지역이 가진 지리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고흥반도는 금관가야가 있는 김해와 침미다례가 있는 해남 반도의 중간 지점에 있어 중국이나 가야, 왜로부터 이입되는 새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늦었다. 더더욱 내륙의 보성강 유역은 산악지대를 관통하며 굽이쳐 흐르는 강의 특성 때문에 외부의 문화 접촉이 더디었다. 이는 토착적 전통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독자적 성격의 문화가 확립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하지만 좁은 분지에서 작은 연맹체들이 고립적으로 나타나는 지나친 폐쇄성은 때로는 연맹의 발전을 막았을 개연성도 높다.

보성강유역은 토착문화가 형성돼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세형동검 같은 철기 시대의 대표적 부장품은 물론 독자적 청동 제품을 주조하는 청동 거푸집이 영암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에서 이 지역 문화의 개방성을 느낄 수 있지만, 전남 동부지역과 고흥반도 등 남해안 일대에서는 같은 단계의 동경(銅鏡)은 물론 세형동검과 같은 철기 시대의 부장품이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의 발전이 그만큼 더디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농경 발달에 따른 잉여 생산력도 미약하여 ‘연맹왕국’ 이전 단계인 군장 사회를 벗어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를테면 보성강 유역은 기원전 늦어도 2세기 무렵부터 연맹왕국이 성립되기 시작한 영산강 유역보다 1세기 이상 늦게 성립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군장사회 단계의 주요한 묘제였던 지석묘가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러서도 아직 주된 묘제로 기능하고 있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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