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8>마한의 복장(複葬) 풍습과 남방문화

 

허무두유적 출토 토기와 뼈 영산강유역이 도작(稻作) 문화가 발달한 중국의 장강 지역과 일찍부터 교류가 활발히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복장(複葬) 풍습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사진은 중국 저장성(浙江省) 위야오 현(餘姚縣) 허무두에 있는 중국 신석기 시대 초기의 유적으로 쌀과 벼, 골제 농기구 등이 출토되어 당시 벼 재배가 있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마한 특별법 ‘영산 르네상스’로 이어져야

11월 18일 전라남도청에서 전라남도와 시군, 관련단체 등이 마한 문화권 지역공동발전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기관은 영암을 비롯하여 목포, 나주, 담양, 화순, 해남, 무안, 함평, 영광, 장성, 신안 등 11개 시군과 국립나주박물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전남대박물관, 목포대박물관,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전남문화관광재단, 나주복암리 고분전시관, 마한연구원 등 8개 관련 기관이 참여하였다. 본란을 통해 몇 차례 언급하였지만, 지난 7월 초 내동리 쌍무덤이 고대 마한 왕국의 왕릉급으로 확인되면서 이 지역 마한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마한문화권 특별법 제정 논의도 탄력을 받아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국회의원이 발의안 가야문화권 특별법안에 마한문화권 특별법안을 결합한 가야·마한·탐라문화권 특별법안으로 수정된 특별법이 제정될 것으로 보인다. 시종지역 왕릉급의 대형고분과 국제무역항 남해포에 위치한 남해신당 등은 이곳이 마한의 역사를 가득 담고 있는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 멀리 인도까지 교류를 통해 형성된 찬란한 ‘영산 르네상스’를 현대적 의미에 맞게 복원하여야 한다. 곧, ‘교류-융합-창조’로 이어지는 마한 실크로드의 본질을 밝혀야 한다. 이를 위해 영암군·영암문화원·지역 언론기관·단체들을 중심으로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특별법이 자칫 중앙정부의 또 다른 잔치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사후 세계를 믿었던 농경사회의 복장

복암리 정촌고분 출토 파리 번데기 껍질을 분석하며 마한사회에 복장(複葬)이 행해졌음을 확인하였다. 복장풍속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사람의 영혼이 사후에 재생하여 그의 신분과 지위를 다시 누린다는 계세(繼世) 사상도 이유의 하나로 지적된다. 그렇지만 이 까닭만으로는 수많은 복장의 문화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곧 문화 인류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유명한 문화 인류학자 말리노브스키(Malinovski)에 따르면, 유족들이 사자(死者)에 대해 품는 정서 반응에는 사자에 대한 애정과 시체에 대한 공포의 모순된 정서가 병존하고 있다 한다. 이러한 모순된 양면적 감정의 균형 관계가 다양한 장법을 개발하게 하였는데, 보편적으로 수렵민족들은 사자에 대한 애석함보다 두려움을 느끼지만, 농경민족들은 사후세계를 믿고 조상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중국의 화남지방이나 동남아시아의 농경사회에서는 1차장과 2차장을 통해 사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포심이 사라지고 친숙함이 회복되어 간다는 것이다. 즉, 생자→죽음(1차장)→이행기간→(2차장) 죽음의 완료(사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체가 부패하여 유골로 변하는 과정으로 상징되는데, 이는 뼈에 영혼이 깃들어 있어 망자와 후손이 공생한다는 믿음이 생겨 뼈를 깨끗이 하여 자기 근처에 안치하는 전통으로 나타났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에 나오는 가족 공동무덤, 곧 세골장(洗骨葬)이 대표적인 예다.

“새로이 죽은 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쌀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 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깎는다. 죽은 자의 수와 같다.”
이밖에도 남녀가 결혼하자마자 수의를 미리 만들어 두었다는 고구려의 풍습 역시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남방문화로 자리 잡은 장강의 장제

복장은 원래 매장된 시체를 발굴하고 뼈를 씻어 다시 장례를 치러 매장하는 것이 전형적인 형태이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옥저 세골장이나 초분, 그리고 지석묘나 옹관묘도 이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다.

복장은 열대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멜라네시아, 뉴질랜드와 같이 적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복장제가 발달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옹관을 많이 이용하고 있는데, 어느 부족의 경우 시체를 도옹(陶壅)에 넣고 다시 다른 도옹으로 덮은 후 1년, 길면 10년 후 이를 거두고 후하게 장례를 치른다. 심지어 목관에 넣어 수장한 후 도옹에 넣는 부족도 있다. 대만의 원주민 사이에 행해지고 있는 복장제는 실내장 및 화장, 세골을 병행하고 있다. 세골장을 실시하고 있는 지역에서 옹관을 사용하는 경우는 보르네오나 중국의 복건성·광동성의 소수민족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복장제는 대만의 원주민보다 중국 남부의 소수민족의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복장은 도작(稻作) 농경과 함께 같은 문화요소를 구성한 ‘문화복합(Culture Complex)’로 이해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문화요소로 난생신화, 벼농사 의례, 농악, 새 모양 곡물 여신, 솟대, 지석묘, 세골장 등을 흔히 말한다. 그런데 이 문화는 중국의 장강 일대에서 많이 보인다. 중국의 대표적인 벼농사 유적인 허무두 유적이 있는 장강유역의 고대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유역 문화보다 오히려 1000년 앞선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 나오고 있다. 곧 동북아문화가 처음 꽃을 피운 지역인 셈이다.

고대의 장강유역에서 살고 있었던 도작, 어로민들이 북쪽에서 살던 한족(漢族)의 침입으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문화는 주로 남방계로 인식되었다. 이 가운데 그들의 장제(葬制)인 복장(複葬)과 이에 수반되는 죽음관이 동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북방계 문화와 남방계 문화가 혼재한 한국과 일본에서는 장강유역에 살던 사람들의 죽음관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왔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의 사자의례의 핵심적 구조는 시체를 일단 매장하는 빈(殯=옥내장)과 일정 기간후 야외로 이장하는 장(葬=옥외장)의 이중적 구조 즉, 복장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장강의 장제가 중국의 전통적인 장제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마한지역의 중요한 묘제로 보성강유역의 지석묘, 영산강유역의 옹관묘를 주목하는데, 이들 묘제가 모두 남방계인 복장과 관계가 깊다. 과거 화산활동이 활발한 보성강유역에는 화산재의 일종인 응회암을 이용한 지석묘를 주된 묘제로 사용하였다. 그러한 석재를 구하기 어려운 영산강유역에서는 옹관을 제작하였다. 지석묘나 옹관묘는 사람의 시신을 바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1차장을 한 후 유골만을 추려 장사를 치른 복장이 행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옹관의 경우 후기로 내려올수록 대형화된 일부 옹관을 제외하고는 시신이 들어가기에는 크기가 작은 독이 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 옹관이 복장 즉 세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믿어진다.

시종 내동리 고분이 있는 마을을 ‘초분골’이라는 부르는데, 이러한 지명이 남해안 곳곳에 많이 보인다. 과거에 초분이 많이 행해졌음을 알려준다. 초분은 시체를 땅 위에 그냥 놓아둔 후 그 위에 풀을 종횡으로 펼쳐놓고 노끈이나 풀로 엮어 봉분을 만들어 노끈 머리는 땅 위에 정을 박아 두르고 큰 돌로 눌러 무덤을 완성한다. 이처럼 풀로 덮는다고 하여 ‘草墳’이라 하는데, 처음 무덤을 쓴다 해서 ‘初墳’이라고도 부른다. 1년, 3년이 지나 새로운 관에 유골을 담아 다른 곳에 매장하기 때문에 ‘복장’으로 볼 수 있다. 내동리 초분골 지명에서, 나주지역에서 일제 강점기까지도 시체를 나무에 세워 매어 놓거나 나무 위에 얹어 놓았다는 사실에서 영산강유역에서 마한시대의 복장의 전통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영산강유역은 남방문화 중심지로 자리잡아

나무에 시신을 올려놓은 것을 가지고 ‘풍장(風葬)’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복장은 다시 본 장례를 치른다는 점에서 다르다. 나무 위에 유체를 올려놓은 사례는 옹관을 이용하는 복장과 비교하여 비용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이 선호하였던 장제 풍습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옥저처럼 지하에 매장한 다음 유골을 꺼내 본장을 치르는 경우는 극히 일부이고, 지상에 안치하여 세골장을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장제는 남방계의 전형적인 특징을 엿보게 한다.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벼농사 재배를 확인해준 유적이 나주 가흥리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도 복장과 함께 영산강유역이 도작문화가 발달한 중국의 장강지역과 일찍부터 교류가 활발히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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