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전몽진(全夢辰 1565~1597)

전몽진은 자(字)가 응서(應瑞)로 공조판서 사민(工曹判書 思敏)의 8대 손이며 감찰 윤(監察 倫)의 손자이다, 첨중추 방필(僉中樞 邦弼)의 셋째 아들로 영암군 서호면 엄길에서 태어났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공은 정유재란(1597년) 때 형 몽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암과 강진의 경계인 율치(栗峙)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영암 서쪽 해암포(海巖浦)에 주둔해 약탈을 일삼는 왜적을 은적산 서쪽 유점동(鍮店洞) 전투에서 맞아 싸웠다.

공(公)은 형 전몽성 대장의 휘하에서, 떼를 지어 몰려드는 왜적과 맞닥뜨려 선봉에서 싸우면서, “대장부는 마땅히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하며 정의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라고 외치며, 용전분투 돌격하여 수많은 왜적을 참살하였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때는 1597년 9월 25일, 공(公)의 나이 젊음이 넘치는 32세이었다. 

형 전몽성을 배향한 장동사(長洞祠)에 1776년(영조52년)에 추배(追配)하였다.
 
(5)전몽태(全夢台 1571~?)
 
전몽태는 자(字)가 응운(應運)으로 공조판서 사민(工曹判書 思敏)의 8대 손이며 감찰 윤(監察 倫)의 손자이다. 첨중추 방필(僉中樞 邦弼)의 4남 중 넷째 아들이며 충신 전몽성의 막내 동생으로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서 태어났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며 특히 효성이 극진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사람됨이 그릇이 크고 강직하여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1603년(선조3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왜란 때는 몽성, 몽진 두 형이 출전하면서 봉친(奉親)의 책임을 막내인 몽태에게 주었다. 자신도 출전의 뜻을 가졌으나 몽성 형의 간절한 당부에 따라 부득이 뜻을 접고 성심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난을 피하여 효성을 다하였다.

공은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都元帥 張晩)의 좌선봉장(左先鋒長)인 학성군 김완(鶴城君 金完)의 막하로 들어가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공은 미리 전세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격분하여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심히 강성하니 만일 조금이라도 추격을 늦춘다면 적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하며, 김완(金完)과 함께 부하 장병을 인솔하고 안현(鞍峴)으로 올라가 도원수 장만의 명에 의해 영마루 서쪽을 수비하였다. 다음날 침공해오는 적을 맞아 김완과 함께 선봉에 서서 독전(督戰)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수십 명을 사로잡았으며 패주하는 적을 이천 묵방리(利川 墨防里)로 추격하여 승첩을 거두었다.

그 전공이 인정되어 1625년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에 책록되었다. 1836년(현종2년)에 형 몽성이 배향되어 있는 장동사에 추배되었다, 1858년(철종9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가 비문을 찬하였다. 1887년(고종24년) 참의를 추증하고 충효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6)전여홍(全汝弘 1578~1659)

전여홍의 자(字)는 관숙(寬淑)이며 병조참판에 증직(贈職)된 몽성(夢星)의 3남 중 장남이다. 1578년(선조12년)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서 태어났다.

공은 일찍부터 무예가 뛰어났다. 임란 때 아버지 참판공이 중봉 조헌(重峯 趙憲)과 초토사 고경명(招討使 高敬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전하여 왜적과 싸울 때 공의 나이는 아직 스무 살이 못 되었으나 붓을 던지고 군무(軍務)에 종사하였다. 공은 군무를 집안 일과 같이 잘 처리하였다.

1597년 정유년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무과에 급제하였고, 곧이어 제포만호(薺浦萬戶)에 제수되었다. 이때 전란의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변경에서는 위급함을 고하므로 공은 부임하자마자 성을 쌓으며 병선(兵船)을 수리하고 군대를 훈련하면서 곡식을 쌓아두어 방어에 걱정이 없게 하였다.

1597년 정유년 9월 해암포에 진을 친 왜적과 유점동 전투에서 아버지 참판공 몽성이 순절하니, 공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노라 맹세하고 상주의 몸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 나아가 군무를 보좌하였으며 노량과 묘도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공은 전공이 인정되어 부사용(副司勇)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충무공이 노량싸움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절했으며, 함께 죽지 못한 것을 종신(終身)의 한으로 여겼다. 전란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문을 닫고 3년 동안 아버지의 상을 마치었다.

공은 1605년(선조38년) 선무원종공신훈(宣武原從功臣勳)에 책록되었으며 1620년 (광해조13년)에 가선대부동지중추(嘉善大夫同知中樞)에 올랐다.

(7)전경홍(全敬弘), 전도홍(全道弘) 형제

전경홍은 자(字)가 유직(有直)으로 증참의 몽일(贈參議 夢日)의 셋째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했다. 전도홍은 자(字)가 유대(有大)로 증참의 몽일(贈參議 夢日)의 넷째 아들이다. 모두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서 태어났다.   

두 형제는 1624년(인조2년) 이괄의 난 때 외종사촌인 양무공 김완과 함께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해 안현 싸움에서 공을 세워 1625년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 되었다.

(8)장동사(長洞祠)
 
장동사는 임진왜란 때 금산 싸움에, 고경명 휘하의 의병으로 참전하여 충의를 다하고, 정유재란 때 영암 해암포에 침입한 왜적을 유점동에서 맞아 교전 중 순절한 의병장 참판 전몽성을 추모하기 위하여 1677년(숙종3년)에 서호면 장천리 장동마을에 건립한 사우(祠宇)이다.

향유(鄕儒)들의 발론(發論)에 의해 전라 도백(道伯)이 공(公)의 공적을 조정에 상달하니. 숙종은 공(公)의 공적을 칭송하면서 특히 「임난항의위국연생(臨難抗義爲國捐生:전란에 다다라 의로서 항거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의 여덟 자를 내리고 참의(參議)를 증하며 사우(祠宇)를 창건케 하였다.

1706년(숙종32년)에 사우(祠宇)를 중수하였다. 1776년(영조52년)에 형 몽성과 함께 유점동 전투에서 순절한 전몽진, 1836년(현종2년)에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이 큰 참의 전몽태를 추배(追配)하였다. 1868년(고종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6년 엄길리로 옮겨 다시 건립하였다,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9)충효문(忠孝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 참전하고, 정유재란 때 영암 해암포에 침입한 왜적을 유점동에서 맞아 싸우다가 순절한 충신 전몽성과 효자 전몽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旌閭)로, 서호면 장천리 장동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1887년(고종24년) 국명(國命)으로 정려의 건립을 지시하고 1898년(광무2년) 지금의 위치에 건립하였다. 천안전씨충효정려기(天安全氏忠孝旌閭記)는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 기록하여 정려 안에 걸려 있다.

충효문 안쪽에는 忠臣 行通訓大夫咸平縣監 贈通政大夫兵曹參議 贈嘉善大夫兵曹參判天安全夢 星之閭 上之二十四年丁亥 命旌(충신 행통훈대부함평현감 증통정대부병조참의 증가선대부병조참판천안몽 성지려 상지이십사년정해 명정)

孝子 振武原勳宣傳官龍驤衛副司果 贈通政大夫兵曹參議天安全夢台之閭 上之   二十四年丁亥 命旌(효자 진무원훈선전과용양위부사과 증통정대부병조참의천안몽태지려 상지 이십사년정해 명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71호로 지정되었다.
 
 

(10)신도비(神道碑)

충효문 옆뜰 바위 바닥에 전몽성 신도비와 전몽태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전몽성 신도비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영암 유점동 전투에서 순절한 참판 전몽성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碑)이다. 1924년 호남 유림들의 건의로 세워졌다. 비문은 송환기(宋煥箕)가 짓고 최병손(崔秉巽)이 썼다.

전몽태 신도비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형 몽성 몽진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출전한 사이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며 효성을 다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1858년(철종9년)에 세웠으며 위백규(魏伯珪)가 비문(碑文)을 짓고 손학순(孫鶴純)이 글을 썼다. 현재의 비는 1858년에 세웠던 것을 1963년에 개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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