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병장 양달사 <7>
영암군, 1971년 공적비 세워 애국충정의 정신계승

도포면 봉호정에 있는 제주양씨 종중 제각. 양달사 의병장은 고조 때 금성(나주)에서 도포면 봉호정으로 세거(世居) 했다. 제각 입구에는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는 하마석(下馬席: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 사용하는 디딤돌)이 놓여 있다.

예문관의 검열과 임금의 친견

우도방어사 김경석이 남정을 대신해 보낸 까닭은 자신의 공을 높이려 했던 것이다. 영암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친 것은 온전히 양달사에 의한 것임에도 김경석은 남정을 대신 임금에게 친견토록 하여 속임수를 썼던 것이다.

이에 사신(史臣: 사초를 쓰던 신하 곧 예문관의 검열 등)은 남정이 비록 김경석의 공을 높이려고 했었지만 그의 움츠린 실상이 말에도 나타나 가리울 수 없었다고 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순찰사는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남정이 이르기를, “나주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임금이 이르기를, “왜구는 날로 번성하는데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비록 이번에 참획한 것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국가의 수치는 조금도 씻지 못하였으니 순찰사와 방어사 및 병사에게 말하여 다시 잘 조치하여 기어코 섬멸토록 하라.”고 했다.

이에 좌승지 이탁(李鐸)이 아뢰기를, “신이 그곳의 지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남정의 말을 들어보고 병가의 일로 헤아려 보면 왜적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참이 바로 기회를 탈 수 있는 순간이니 만일 우리 군사들이 힘을 합쳐 공격한다면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군사들이 바야흐로 작천(鵲川)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하니, 만일 왜적들이 내지로 들어와서 배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면 모조리 잡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왜놈들이 여기에 있으면서 도망하여 흩어지게 된다면 반드시 동쪽에서 충돌하고 서쪽에서 공격할 염려가 있으므로 기필코 섬멸한 다음에야 그만 둬야할 것이니, 이러한 뜻을 순찰사에게 말하라.”고 하니, 이탁이 또 아뢰기를, “왜놈들이 달량을 함락한 뒤부터 우리나라를 만만하게 여겨 사방으로 분산하여 들어왔습니다. 영암에서 이긴 것을 바로 기회로 삼아야 할 때인데 다만 돌아가는 길을 끊어버리지 못한다면 잡지 못하게 될 듯 싶습니다.”고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상벌(賞罰)을 논하다 

명종 10년 9월 6일, 임금은 녹도와 영암의 군공을 병조와 비변사가 상의하여 시행할 것을 전교한다.

“녹도(鹿島)와 영암의 군공은 김경석, 조안국과 같이 죄를 입은 사람은 녹공(錄功)에 참여할 수 없고, 그 나머지는 한결 같이 경오년의 예에 의하여 할 것이며, 공을 의논하는 일은 병조와 비변사가 상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따라 비변사가 공이 있는 사람을 위로할 것을 아뢰고(명종 10년 7월 15일), 양사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조안국과 김경석을 법률에 따라 처할 것을 임금께 아뢰었다.(8월 28일)
사간원이 우도방어사 김경석, 병사 조안국, 최인, 홍언성, 이세린, 노극정 등의 처벌을 임금께 진언하였다.

김경석을 율(律)에 의해 처할 것을 사간원(司諫院)이 아뢰었다.(명종 10년 7월 15일)
사간원(司諫院)이 아뢰기를, “김경석은 방어사의 책임을 맡아 많은 정병을 거느리고 영암에 주둔한지 수 삼일이 되었으니, 강진의 정세가 위급하면 마땅히 총력을 기울려 달려가 구원했어야 하는데도 군사를 출동시킬 의사가 없었습니다. 영암에서 강진까지는 불과 40리로 간첩(間諜)을 나누어 파견하여 은밀하게 탐정하면 하룻밤에 그 정황을 모두 탐지하여 알 수 있었는데도 한 명의 군사도 출동시켜 구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진도와 강진이 함락되고, 다음엔 병영이, 그 다음에는 장흥이 함락되었는데도 김경석은 영암에 굳게 버티고 앉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중략)

김경석은 윤원형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백금 1백냥과 명박(明珀) 등 보물을 뇌물로 바치고 면하였습니다.

조안국은 영암이 건너다 보이는 곳에 진을 쳐 성원(聲援)하지 않고 먼 곳에 의병(疑兵)을 설치하였을 뿐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세린은 적에게 포위되자 성을 버리고 나가 10리 밖 바위굴 속에 숨었고, 군량 1백여 석을 꺼내 배에 실었다가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그가 숲속에 숨어서 적을 쏘았다고 한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병마절도사 원적은 전혀 설비를 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왜적을 만나 이토록 극심한 국욕을 당하게 하였으니, 죽었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모두 나라를 위해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죄가 적몰(籍沒, 중죄인의 가산을 몰수함)에 해당되기는 해도 오히려 가련한 생각이 듭니다.

영암인이 보여준 애국충정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말은 영암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한반도의 서해 남단에 위치한 영암은 지정학적 특수성과 지리적 환경때문에 고대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빛과 그림자가 뚜렷하다. 고대부터 문화가 다른 지역보다 빨리 발전했는가 하면, 한반도가 격랑(激浪)에 휩싸일 때는 그 중심에 있어 왔다. 그래서 국란이 있을 때는 국란을 평정하기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몸을 바쳐 싸웠다. 그래서 상처 또한 깊고 크다.

왜구들이 일으킨 을묘왜변도 국가적 변란 중의 하나이다. 왜구는 이루말로 표현할 수없이 악랄하였는데, 남해안 일대를 1년에도 한 두 차례씩 해적질을 해갔다. 을묘왜변은 일명 달량진 왜변으로, 왜구는 우리나라 군사가 지키고 있는 달량진성을 함락, 노략질을 하면서 영암까지 쳐들어 왔으나 이들의 위세에 우리나라 정부군은 대적하지 못하여 군민들이 불안에 떨면서 우리 정부군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있을 때 영암인으로 해남현감 직을 사임하고 모친의 시묘(侍墓)를 하고 있던 양달사 형제가 영암읍성으로 들어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구들과 육박전을 벌여가면서 왜구를 격퇴시킴으로써 국란을 평정하게 되었다.

이는 국란을 당하여 영암인들이 보여준 애국충정이요, 기개의 한 사례라 하겠다. 그래서 늦게나마 당시의 국란을 평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양달사 의병장의 공덕을 바르게 평가하고 이를 기리기 위하여 국가적으로 조선조 헌종 때에 장군에게 좌승지(左承旨)를 추증(追贈) 하였고, 영암군민들은 만시지탄(晩時之歎)감이 없지 않으나 1971년 창의장 양공달사공적비(倡義將梁公達泗功績碑)를 건립하여 장군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를 후대에 전승하고 있다.<끝>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